그림을 그리듯 동해를 요리하다
묵호 자연산 문어와 레몬, 허브로 상큼하게 완성한 문어 카르파초, 민들조개를 화이트와인에 찐 째복 와인찜, 단맛이 살아 있는 보리새우와 매콤한 특제소스를 더한 보리새우무침. 동해의 식재료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나올 수 없는 음식들이다. 이병옥 한섬 셰프의 요리는 정갈하면서도 화려하고, 깊으면서도 산뜻하다. 한때 화가를 꿈꾸는 그는 지금 접시 위에 맛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마치 일출이 바다 위에 색을 얹듯 그의 손끝에서 재료들은 저마다의 빛을 얻는다.
황해도 출신인 어머니의 손맛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미식에 눈을 떴다는 그는 한번 맛본 음식은 어떤 재료가 쓰였는지, 맛의 중심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짚어낸다. “함께 식당을 운영하는 동생은 제게 ‘그림을 그리듯 요리한다’라고 표현해 주기도 했죠.” 요리를 본격적으로 업으로 삼게 된 건 의외로 단순했다. 그의 음식을 맛본 사람들이 건넨 말들이었다. “위로받는 느낌이다”, “대접받는 기분이다”, “재료의 신선함이 살아있다”라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듯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누군가의 하루에 작은 위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를 셰프의 길로 이끌었다. 그는 책과 영상으로 공부하며 자신만의 요리 세계를 만들어가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 재료를 대하는 태도부터 조합을 풀어내는 방식까지, 그 모든 과정은 그의 손에서 천천히 쌓아 올린 결과다.
“요리를 하다 보면 ‘이 조합에서 이런 맛이 나는구나’, ‘이건 몰랐던 조합인데’, ‘이렇게 하니까 이런 신기한 맛이 나오는구나’ 하고 놀랄 때가 많아요. 그런 발견을 하나씩 쌓아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설렘이 요리의 가장 큰 매력인 것 같아요.”
그에게 요리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동해의 미식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과정이다.
제철 재료로 완성한 한 접시
이병옥 셰프가 요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키워드는 ‘제철’ 이다. 동해는 좋은 식재료를 가장 신선한 상태로 만날 수 있는 곳이기에, 그에게는 요리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그는 시장을 돌며 그 계절에 가장 좋은 로컬 식재료를 고르고, 재료의 그날그날 상태에 따라 메뉴를 유연하게 구성한다.
그래서 한섬의 메뉴판에는 신선한 단어와 재료의 조합이 가득하다. 묵호 앞바다 문어 카르파초, 망상 째복 와인찜, 동해 보리새우무침처럼 메뉴 이름에는 지역의 이름을 그대로 담았다. 어떤 맛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 이름을 마주하는 순간부터 ‘행복한 기다림’이 시작된다.
“‘째복’은 민들조개를 부르는 동해 사투리예요. ‘쩨쩨하고 보잘것없다’ 해서 붙은 이름이지만, 맛은 결코 그렇지 않아요. 감칠맛이 좋아 제가 만든 조개 와인찜 중 단연 최고라고 생각해요. 조개를 먹은 후 파스타를 추가하면 또 하나의 요리가 완성되죠.” 겨울이 되면 바닷물이 차가워지면서 해산물 맛은 한층 깊어진다. 특히 이맘때 동해 보리새우는 탱글탱글한 식감과 단맛이 절정에 이른다. 묵호항에서 바로 공수한 자연산 재료들이기에 신선함을 말할 것도 없다. 그가 제철 식재료가 지닌 고유의 맛과 향을 최대한 살리는 요리를 고집하는 이유다.
밥 한 끼에 담긴 마음, 요리가 이어주는 인연
엄마가 새벽부터 차려낸 밥상, 할머니가 손주를 위해 끓여준 된장찌개 한 그릇, 오랜만에 모인 친구들과 나눈 저녁 한 끼. 그 안에는 언제나 정성과 마음이 담겨 있다. 이병옥 셰프에게 요리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과 사랑을 전하는 특별한 순간이다.
이 생각은 우리말 ‘식구’와도 닮아 있다. 식구는 함께 밥을 먹는 사이를 뜻하지만, 혈연을 넘어 진정으로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결국 밥을 나눈다는 건 한 식탁에 마주 앉는 일을 넘어, 서로를 이해하고 마음을 나누며 사랑을 주고받는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는 셈이다.
로컬 음식을 찾아 전국을 여행하던 부부 손님이 “로컬 재료로 정말 맛있는 음식을 해줘서 고맙다”라며 서울 자택으로 초대했던 일, “정말 좋은 음식을 먹었다”라며 잔돈을 챙겨 건네던 스페인 여행자들, 그리고 “음식은 심장으로 전해진다”라는 체코의 속담을 알려준 체코 친구까지. 이병옥 셰프에게 이들은 모두 ‘식구’다. 그래서 그는 요리를 하면 할수록 더 어렵다고 한다.
“사람들과 직접 부딪혀보고 대화도 나누고, 그 지역의 기후와 환경을 알아야 로컬 요리가 제대로 나와요. 레시피만 따라 한다고 완성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기회가 된다면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셰프들이 만든 요리를 직접 맛보고 싶어요. 그러면 제 요리의 깊이도 더해지지 않을까요.”
동해의 미식을 끌어올린다는 것은 결국 한 접시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다. 이병옥 셰프는 오늘도 동해의 식재료로 그런 순간을 만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