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산된 에너지를 하나로 묶다, 가상발전소

기후위기 대응과 탄소중립을 향한 세계 각국의 움직임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됐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주요 국가들은 태양광과 풍력을 중심으로 재생에너지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화석연료 중심의 에너지 체계에서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자, 미래 세대를 위한 불가피한 전환이다.
하지만 재생에너지는 태생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태양과 바람이라는 자연조건에 좌우되는 만큼 발전량의 변동성이 크다는 것이다. 햇볕이 강한 날에는 전력이 넘치고, 흐리거나 바람이 잦아들면 공급은 급격히 줄어든다. 예측이 쉽지 않은 발전 특성은 전력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흔들고, 전력계통 안정성을 위협한다. 이 불균형이 누적될 경우, 최악의 상황에서는 대규모 정전, 이른바 ‘블랙아웃’으로 이어질 수 있다. 재생에너지 확대와 함께 전력계통 운영 방식의 혁신이 동시에 요구되는 이유다.
이 같은 고민의 해법으로 떠오른 기술이 바로 가상발전소(Virtual Power Plant, 이하 VPP)다. VPP는 ICT 기술을 바탕으로 물리적으로 흩어져 있는 다양한 재생에너지원을 하나의 발전소처럼 통합 운영하는 시스템이다. 태양광, 풍력, 수력, 에너지저장장치(ESS) 등 분산된 에너지 자원을 실시간으로 연결해 생산과 분배를 조정한다. 개별 자원은 소규모일지라도, 이를 묶어 제어하면 대형 발전소에 준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VPP의 핵심은 ‘통합 제어’다. 실시간 데이터 수집과 분석을 통해 발전량과 수요를 예측하고, 필요한 만큼 전력을 생산·저장· 공급한다. 그 결과 전력계통의 유연성은 높아지고, 재생에너지의 불안정성은 자연스럽게 보완된다.

VPP 구성 방식

  • 공급형 VPP
    태양광·풍력처럼 변동성이 큰 재생에너지에 수력, 양수발전, 배터리 등 제어 가능한 자원을 결합해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가능하게 한다.
  • 수요형 VPP
    주택용 태양광, 건물용 ESS(B-ESS), 공조설비(HVAC) 등 수요자원을 활용해 전력 사용량을 줄이거나 잉여전력을 전력시장에 공급하는 방식이다.
  • 융합형 VPP
    분산형 재생에너지와 ESS를 활용한 공급 기능에 더해 수요반응(DR), 에너지 효율화 기술을 결합해 전력계통 안정화에 기여한다.

성장 가속화되는 글로벌 VPP 시장

VPP는 글로벌 시장에서 이미 검증 단계를 넘어섰다. 글로벌 VPP 시장 규모는 2025년 약 33억 달러(약 4조 6천억 원)로 추산되며, 연평균 25%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해 2033년에는 약 207억 달러(약 29조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ESS 보급 확대와 비용 효율성 개선, 각국 정부의 재생에너지 활성화 정책이 시장 성장을 이끌고 있다. 특히 전력시장 제도가 유연한 국가일수록 VPP 사업 모델이 빠르게 정착하는 모습이다.
유럽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다양한 VPP 사업이 활발히 운영 중이다. 독일의 Next Kraftwerke는 유럽 최대 규모의 VPP 사업자로, 자체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수천 개의 분산 에너지 자원을 통합 운영한다. 가정용 배터리 제조사 Sonnen은 개인 간 전력거래(P2P) 플랫폼을 기반으로 에너지를 ‘소비재’가 아닌 ‘거래 자산’으로 바꾸며 새로운 시장을 열고 있다.
미국에서는 Sunverge Energy가 실시간 데이터 기반 분산에너지 관리 플랫폼을 선도하고 있다. 가정용 에너지관리 시스템과 스마트 온도조절기, 온수기 등을 연계해 수요관리 중심의 VPP를 구현했다. Tesla는 주택용 태양광 패널과 배터리(Powerwall)를 결합한 VPP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참여자에게 경제적 보상을 제공하고 있다.
일본은 2021년 수급조정시장 개설 이후 VPP 시장 참여가 본격화됐다. Mirai Energy는 태양광 설비 무상 설치와 잉여전력 매입, 유지관리 서비스를 결합한 사업 모델을 운영 중이며, Toshiba는 IoT·AI 기반 분산전원 및 ESS 실시간 관리 기술을 바탕으로 VPP 사업과 컨설팅을 제공하고 있다.

국내 VPP 시장의 과제와 가능성

반면 우리나라는 VPP 집합 자원화의 시작단계이다. 2019년 '소규모 전력중개시장' 제도가 도입되었다. 이는 중개사업자가 태양광, 풍력, ESS, 전기차 등 20MW 이하 소규모 전력자원으로부터 나온 전력을 모아 전력시장에 참여하는 제도이다.
2024년 6월 제주도를 시작으로 시범사업이 진행됐으며, 한국수자원공사도 2025년 4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장에 참여하고 있다. 하루 전 발전량을 예측해 입찰하고, 실제 발전량이 일정 오차 범위 내에 들어올 경우 추가 정산금을 받는 방식이다. 이는 재생에너지 발전 예측 기술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수자원공사는 수력발전을 중심으로 국내 최대 규모의 재생에너지 사업자다. 전국에 분포한 수력·태양광·조력 발전소를 활용한 지역별 VPP 구축은 물론 수도사업장의 비상발전기와 펌프 설비 부하 조정을 통한 수요자원 반응 시장 참여도 가능하다.
앞으로 국내 VPP 시장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기술과 제도가 함께 뒷받침돼야 한다. 분산된 재생에너지 자원을 실시간으로 감시·제어할 수 있는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다. 센서, RTU, 서버를 통한 데이터 수집은 물론 발전·수요 예측을 위한 분석 연산 장치와 자동제어 인프라도 필수적이다. 특히 자연환경 의존성이 큰 재생에너지 특성을 고려하면 발전량 예측 정확도를 높이는 AI 기반 기술 고도화가 중요하다. 전력 수요 전망을 반영해 다수의 분산 전원을 조합·운영할 수 있는 운영 역량 축적도 함께 요구된다. 국내 VPP 활성화를 위해서는 사업자의 경제성을 확보하고,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전력시장 제도 개선도 함께 추진돼야 할 것이다.

글로벌 VPP 사업 현황

  • 유럽
    •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서 VPP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 중
    • - Next Kraftwerke → 유럽 최대 기업 VPP
    • - 가정용 배터리 제조기업 Sonnen → 개인 간 P2P 거래 플랫폼 기반 시장 확대 중
  • 미국
    • 분산에너지 자원 관리 수요관리 스마트 기기 연동 등을 위한 VPP 플랫폼 구축이 활발
    • - Sunverge Energy 등 VPP 기술 선도
    • - 캘리포니아州 → 시간대별 요금제 확대, 스마트 인버터 도입 등 VPP 활성화 중
  • 일본
    • 수급조정시장 개설 등(2021년 4월) VPP 시장 참여 활성화 중
    • - 재생에너지 예측 오차 대응을 위한 3차 조정력 시장에 VPP 참여 허용 등
  • 호주
    • 소매전력 시장 변화에 따라 VPP 도입·운영이 활발하게 진행
    • - Ausgrid → 배터리 VPP 실증 사업 등 다양한 VPP 프로젝트 진행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