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둣빛 찻잎이 햇살을 머금고 자라듯, 하동 차(茶)도 사람의 손길 속에서 조금씩 자란다.
찻잎을 덖는 시간은 곧 마음을 키우는 시간.
김완준 제다인은 오늘도 한 잔의 향기 속에 계절과 이야기를 담아내며,
차와 함께 자신의 길을 단단히 넓혀가고 있다.
글. 최행좌 사진. 황지현
찻잎을 덖으며, 나의 세계를 넓히는 일
봄이면 온 동네가 연두색 파스텔을 칠한 듯 싱그러워지는 하동. 100여 개의 다원이 펼쳐진 이곳에선 자연이 길러낸 찻잎이 은은한 향을 틔운다. 지리산 자락에 자리한 도재명차 역시 그 풍경 속 한가운데 있다. 김완준 도재명차 실장은 찻잎을 따서 덖고, 비비고, 말리는 청년 제다인이다. 호주에서 유학하던 그는 코로나19로 귀국하며 뜻하지 않게 고향 하동에 돌아오게 됐다. 2주간의 자가격리 동안 차실에 앉아 차를 마시고 풍경을 바라보던 시간은 삶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일상에서 차가 건네는 위로를 새삼 느끼며, 태어나 자란 이곳이 얼마나 소중한지 마음에 새기게 됐다고.
“‘일상다반사’라는 말이 있잖아요.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제 일상이 됐어요. 내가 몰랐던 차를 알아가면서 사람도 만나고, 그렇게 내 세계가 조금씩 넓어졌죠. 원래 승무원을 꿈꿨는데 멀리 떠나는 것만이 여행은 아니라는 걸 그때 알았죠.”
‘차 수저’로 태어난 그는 홍차 명인인 아버지를 따라 자연스럽게 가업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하동청년농식품벤처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지역 농산물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차밭 체험과 숙박을 연계한 프로그램도 기획했다. 차를 ‘스쳐 가는 여행’이 아니라 ‘머무는 경험’으로 만들고 싶어서였다. 수확철에는 ‘제다 체험’을, 평소에는 예약제로 차 코스를 운영한다. ‘티 오마카세’라는 이름도 있지만 그는 ‘차담’이라는 표현을 더 좋아한다.
“차는 결국 사람을 마주 앉게 하는 매개예요.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가 피어나거든요. 그게 참 좋아요.”
무쇠솥 위에서 단단해지는 법
아버지의 호에서 따온 ‘도재(荼在)’는 ‘전통의 차가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름처럼 이곳은 전통 방식을 고수한다. 일본처럼 증기로 찌는 방식이 아니라 무쇠솥에 찻잎을 덖는 방식이다. 커피 생두를 로스팅하듯 찻잎을 볶아서 익히는 과정은 느리지만 묘하게 중독적이라고. 뜨거운 솥 안에서 찻잎이 구수한 향을 내며 변모하듯, 그 역시 인내의 시간을 지나며 덖음 전문가로 성장하고 있다.
“무쇠솥은 사람 손을 기억해요. 찻잎을 굴리다 보면 어느 순간 불의 세기와 향의 높이가 손끝으로 느껴지죠. 어떻게 덖는지에 따라 맛과 향이 완전히 달라지거든요.”
이 과정을 거친 찻잎은 녹차, 홍차, 백차 등 다양한 차로 완성된다. 특히 이곳의 대표 차는 ‘잭살차’다. 찻잎이 참새 혓바닥처럼 작다는 ‘작설(雀舌)’의 하동 사투리에서 온 이름이다. 유자, 모과, 돌배, 생강, 홍차를 블렌딩해 달고 부드러운 맛이 특징이다. 그는 매일 다른 향을 만나는 이 순간을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기분”이라고 한다.
하동 차, 세계 뻗어가는 여정
하동 차는 자연과 사람이 함께 키운다. 자연에서 자라는 ‘야생차’지만, 찻잎을 따는 일만큼은 사람의 손을 거친다. 와인에 ‘떼루아’가 있듯 차에도 땅의 기억이 배어 있다. 경사지고 돌이 많은 차밭은 물 빠짐이 좋고, 수많은 나무 그늘은 여름엔 차광, 겨울엔 보온이 된다. 자연이 차밭의 지붕이자 담장이 되는 셈이다. 그렇게 혹독한 겨울을 견딘 찻잎일수록 깊은 맛을 낸다.
그는 이 하동 차를 세계에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2024년 라스베이거스 월드 티 엑스포에 참가해 해외 바이어들과 교류한 이후 현재 미국과 독일, 프랑스 등 여러 나라로 수출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에는 덖음차보존회 회원들과 함께 프랑스에 제다학교 설립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낯선 땅에서 차를 따고 덖으며 역사와 철학을 나누는 시간은 잊지 못할 경험으로 남았다. 이렇게 차향이 국경을 넘는 순간, 그의 세계 또한 한 뼘 더 넓어졌다고.
“차를 소개하다 보면 ‘이 깊은 향은 무엇이냐’, ‘이 맛의 정체는 뭐냐’고 물으세요. 그럴 때마다 제가 지켜온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의 목표는 단순하다. 하동 차를 더 넓은 세상에 알리는 것. 다만 깊이와 전통이 가볍게 소비되지 않도록, 어렵지도 가볍지도 않게 균형을 잇는 일이다.
“요즘 말차가 인기잖아요. 직접 만들진 않지만, 차가 젊은 세대의 일상으로 스며드는 건 정말 반가운 변화라고 생각해요. 다만 차가 유행으로 끝나지 않고 오래 곁에 두는 문화가 됐으면 좋겠어요.”
결국 그가 덖는 것은 찻잎만이 아니다. 시간과 기억, 그리고 다음 세대에 건넬 향기다. 오늘도 무쇠솥 위에서 은은히 피어오르는 김처럼, 그의 하루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성장의 궤적을 그리며 이어진다. 그리고 그 여정은 꽤 향기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