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개장터, 섬진강 줄기 따라 장이 선다
여정은 하동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감초, 화개장터에서 출발한다. 유명가요 ‘화개장터’ 노랫말처럼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 따라…’ 시끌벅적 장이 열린다. 화개장터는 해방 전까지만 해도 조선팔도에서 손꼽히는 큰 장이었다. 인근 지리산의 화전민들은 고사리, 더덕 등을 바리바리 가져왔고, 전남 구례, 경남 함양 등 내륙지방 사람들은 쌀과 보리 등 곡류를 내왔다. 조선팔도를 떠돌던 보부상들도 이곳을 놓칠 리 없었고, 여수, 광양, 남해, 삼천포, 충무, 거제 등 바닷가 사람들은 뱃길을 이용해 수산물을 가득 싣고 왔다. 보기엔 그냥 시골 장터 같지만 있어야 할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었다.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모여들며 서로 다른 언어와 풍습이 섞였고, 이는 하동만의 독특한 시장 문화를 형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비록 현대에 들어 상업화로 인해 옛 정취가 희석되었다는 아쉬움도 들리지만, 숱한 만남과 이별 속에서 삶의 외연을 넓혀온 시장의 역동성은 여전하다. 특히 장터 입구 대장간에서 울려 퍼지는 둔탁한 망치 소리는, 이곳의 역사가 박제된 과거가 아닌 현재진행형임을 생생하게 증명한다.
화개장터를 뒤로하고 1023번 지방도를 따라 발길을 옮긴다. 매년 4월 초면 약 5㎞에 걸쳐 분홍빛 꽃길이 펼쳐져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낸다. 이 길 위의 벚나무 1,200여 그루는 1931년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 신작로가 놓일 당시 주민들이 직접 심은 것이다. 척박한 시대에 주민들이 정성껏 심은 묘목들이 이제는 거대한 벚꽃터널이 되어 여행자를 맞이한다.
  • 화개장터
  • A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탑리
  • T 055-883-5722
  • 드라마 <토지> 촬영지 최참판댁
  • A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길 66-7
  • T 055-880-2960
최참판댁과 평사리 들녘
십리벚꽃길의 허리춤에는 악양면 평사리가 자리한다. 소설가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주 무대다. 흥미로운 점은 작가가 이곳에 연고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직 이곳의 풍경에서 소설의 영감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탁 트인 평사리 벌판과 비옥한 토지, 그 곁을 굽이치는 섬진강과 병풍처럼 마을을 품은 지리산까지. 모든 조건이 대하소설의 장대한 서사를 담아내기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악양면은 30개 마을이 어우러진 ‘슬로시티’다. 과거 나당연합군을 이끌던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이곳의 풍광을 보고 “중국 후난성의 악양과 흡사하다”라며 감탄하여 이름 붙였다고 전해진다. 느림의 미학을 실천하는 마을답게, 이곳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야 제맛이다.
먼저 마을 입구의 동정호를 찾았다. 고요한 호숫가엔 꽃들이 봄을 노래하고, 가지마다 돋아난 연둣빛 새순들은 봄바람에 몸을 맡긴 채 춤을 춘다. 호수를 지나 높다란 언덕 위 최참판댁을 향해 걷다 보면 어느새 숨이 가빠온다. 하지만 멈추지 말고 끝까지 올라가 보길 권한다. 정상에 서서 뒤를 돌아보는 순간, 바둑판처럼 정갈하게 나뉜 악양 들녘이 시야 가득 펼쳐지기 때문이다. 따스한 기운이 잠든 대지를 깨우고 파릇한 새순이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왜 작가가 이곳에서 그 거대한 이야기의 실마리를 찾았는지 충분히 공감하게 된다.
길은 소설 속 인물들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마을로 이어진다. 길상이네와 소작인 가옥, 이평이네 등 소설 속 장면이 입체적으로 살아난다. 그중 여정의 정점은 단연 최참판댁이다. 특히 최고의 풍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사랑채 누마루와 주인공 서희의 고결한 슬픔이 서린 별당채는 반드시 챙겨봐야 할 백미다.
왕의 차, 그 깊은 향기를 따라서
촘촘한 벚나무 사이사이로 푸른 차밭이 끝없이 펼쳐진다. 가지런히 다듬어진 차나무들은 마치 초록빛 가래떡을 뽑아 놓은 듯 정갈하다. 흔히 녹차 하면 보성을 떠올리지만, 하동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야생 차나무가 자생하는 진정한 ‘차(茶)의 고향’이다.
우리나라 차 문화의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시작되는데, 신라 선덕여왕 때 이미 차를 마셨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특히 하동 화개 지역은 신라 시대부터 왕실에 차를 진상하던 대표적인 ‘다소(茶所)’였다. 고려 시대에는 궁중 차를 관장하는 ‘다방(茶房)’ 이라는 관청이 있었고, 하동은 구한말까지 임금께 차를 올리던 곳이었다. ‘왕의 차’라는 별칭은 하동 차가 지닌 독보적인 위상을 증명한다.
하동 차는 대나무 이슬을 먹고 자란 잎으로 만들었다 하여 ‘죽로차(竹露茶)’, 참새 혓바닥처럼 작은 잎을 닮았다 하여 ‘작설차(雀舌茶)’라고도 불린다. 천혜의 자연환경이 빚어낸 명품이다. 쌍계사 초입의 하동야생차박물관(차문화센터)에 들르면 차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살필 수 있으며, 정성 어린 다례 체험을 통해 차 한 잔의 여유를 배울 수 있다.
박물관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는 차와 깊은 인연을 맺은 쌍계사가 자리한다. 신라 성덕왕 22년(723년)에 창건된 쌍계사는 ‘두 갈래 물길이 만나는 곳’이라는 이름처럼, 세속의 번잡함이 씻겨 내려가고 종교적 경건함이 차오르는 경계에 서 있다. 화사한 봄기운에 들떴던 마음도 일주문을 통과하는 순간 차분히 가라앉는다. 경내에는 최치원이 진감선사의 업적을 기리며 비문을 지은 국보 ‘진감선사탑비’가 천년 세월을 묵묵히 견디고 있으며,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은 지리산의 깊은 품에 안겨 단아한 기품을 뽐낸다.
  • 쌍계사
  • A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길 59
  • T 055-883-1901
  • 하동야생차박물관
  • A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쌍계로 571-25
  • T 055-884-2955
하동송림과 해뜰목장, 정적 휴식과 동적 교감
섬진강 물줄기가 휘감아 도는 곳에는 300년 역사의 천연기념물 하동송림이 있다. 조선 영조 21년(1745년), 강바람과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조성된 이 숲은 약 2㎞에 걸쳐 노송들이 장관을 이룬다. 숲에 발을 들이면 코끝을 찌르는 진한 솔향에 압도된다. 강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퍼지는 솔향을 맡으며 강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멈춘 듯한 평화로움에 젖어 든다.
하동송림이 정적인 휴식처라면, 옥종면에 위치한 해뜰목장은 생동감 넘치는 교감의 장이다. 지리산 옥산을 병풍 삼아 펼쳐진 초원에서 양과 염소, 젖소들이 노니는 풍경은 마치 유럽의 산골 마을에 온 듯 이국적이다. 이곳에선 풍경을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송아지 우유 주기, 피자 만들기 등 다채로운 낙농 체험을 즐길 수 있어 가족 여행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직접 만든 신선한 요거트와 빵을 챙겨 잔디밭에서 즐기는 피크닉은 해뜰목장 여행의 백미다.
흔히 ‘성장’을 속도의 문제로 오해하곤 한다. 하지만 이번 하동 여행에서 배운 성장은 ‘깊어짐’에 있었다. 어린 찻잎이 인고의 시간 끝에 깊은 향을 품은 차가 되듯, 우리의 삶도 하동의 봄처럼 천천히, 그러나 깊게 익어가리라 믿는다.
해뜰목장

A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양구1길 31-108

T 055-810-8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