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공업도시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순간, 울산의 진짜 재미가 시작된다.
1970년대 레트로 감성과 푸른 돌고래를 동시에 만나는 장생포고래문화 특구를 시작으로 동해안에서 가장 먼저 아침을 여는 간절곶의 장엄한 풍광,
죽음의 강에서 생명의 숲으로 기적처럼 거듭난 태화강 국가정원의 초록빛 쉼표,
그리고 선사인의 예술혼이 깃든 반구대 암각화와 울산의 예술 거점이 된 북구 창작공간까지.
우리가 미처 몰랐던, 상상 그 이상의 울산을 마주할 시간이다.
글. 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울산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울산 하면 으레 거대한 공장 굴뚝과 차가운 철강의 풍경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장생포고래문화특구에 발을 들이는 순간, 그 고정관념은 기분 좋게 무너진다. 특구에 조성된 고래문화마을은 과거 포경 산업의 전성기를 누렸던 장생포의 옛 모습을 그대로 복원한 공간이다. 골목에 들어서면 마치 시간을 되돌려 1970년대 어촌 마을에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시간 여행을 좀 더 특별하게 즐기고 싶다면 옛날 교복을 빌려입고 골목을 누벼보자. 고래 해체장부터 추억의 학교, 우체국, 당시 포수들의 집까지 정겨운 풍경이 이어진다. 그 길 위에서 삭막한 도시 이면에 숨겨진 따뜻한 인간미와 역동적인 삶의 흔적을 마주하게 된다.
이 마을의 매력은 단순히 과거를 박제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고래와 함께 살아왔던 이들의 꿈과 상상을 현대적인 문화 콘텐츠로 생생하게 풀어냈다. 덕분에 여행객들은 ‘이야기가 살아있는 울산’을 온전히 경험한다. 구석구석 자리한 익살스러운 조형물과 벽화들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상상 속에 존재하던 과거의 활기를 현실로 불러내며, 동네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책으로 만든다.
마을에서 조금만 걸음을 옮기면 국내 유일의 고래 전문 박물관인 장생포고래박물관에 닿는다. 박물관에는 거대한 고래 골격과 실제 포경선이었던 ‘제6진양호’가 원형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관람객들은 한때 바다와 사투를 벌이며 살아야 했던 치열한 삶의 현장을 가슴 깊이 실감하게 된다.
돌고래의 일상을 직접 관찰할 수 있는 국내 최초의 전시형 수족관, 고래생태체험관도 빼놓을 수 없다. 이곳은 다양한 수중생물을 만나는 즐거움을 줄 뿐만 아니라, 해양수산부가 지정한 ‘해양동물 전문 구조·치료기관’ 역할도 겸한다. 조용히 헤엄치는 돌고래의 몸짓은 우리에게 해양 생태계 보존이라는 소중한 미래의 과제를 넌지시 건네고 있다.
장생포고래박물관
A 울산광역시 남구 장생포고래로 244
T 052-256-6301~2
장생포고래문화마을
A 울산광역시 남구 장생포고래로 271-1
T 052-226-0980
울산의 자랑, 간절곶의 소원과 태화강의 기적
동해안 끝자락의 간절곶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아침을 여는 곳이다. 매년 초가 되면 이 장엄한 풍광을 마주하려는 이들이 전국에서 구름처럼 몰려든다. 가장 먼저 어둠을 깨운다는 지리적 상징성은 무척 강렬하다. 덕분에 이곳은 삶의 중대한 분기점에 선 이들이 새로운 결심을 다지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거대한 소망우체통은 간절곶의 랜드마크다. 여행자들은 저마다의 소원을 엽서에 꾹꾹 눌러 담으며 미래의 나에게 보낼 다짐을 적어 내려간다. 탁 트인 바다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은 일상의 무기력증을 단숨에 날려버리고, 잠자던 에너지를 몸속 가득 채워준다.
이곳에는 거친 바닷바람을 맞으며 먼바다를 응시하는 모녀상이 있다. 왜국으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 되었다는 신라 충신 박제상 아내의 설화가 깃든 동상이다. 남편의 무사 귀환을 바라보는 모녀의 시선에는 애달픈 서글픔이 깊게 머물러 있다. 그 옛날 모녀가 가슴에 품었던 간절한 염원은 오늘날 이곳을 찾는 이들의 소망과 묘하게 겹친다.
간절곶이 거친 바다의 에너지를 담고 있다면, 태화강 국가정원은 울산의 치유와 회복을 상징한다. 한때 태화강은 산업화의 그늘 속에서 폐수가 그대로 유입되어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하던 ‘죽음의 강’이었다. 하지만 이 절망의 강은 민관의 끊임없는 노력 끝에 마침내 지금의 눈부신 초록빛 정원으로 거듭났다. 정원의 중심에는 4.3㎞에 달하는 십리대숲이 울산의 청정 허파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거대한 대숲의 역사는 깊다. 일제강점기 시절, 잦은 홍수로 농경지 피해가 극심해지자 수해를 막기 위해 백사장 위에 대나무를 심은 것이 시초였다. 과거 홍수를 막아주던 생명의 방어벽이 이제는 도심 속 가장 거대한 휴식처로 진화한 셈이다. 대숲은 바람이 지날 때마다 댓잎의 노래를 들려준다. 이 소리에 집중하다 보면 도심 한복판이라는 사실을 이내 잊게 된다. 공업도시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녹색 정원과 죽음의 강에서 생명의 숲으로 거듭난 태화강의 극적인 변화는, 상상이 어떻게 현실이 되는지 선명하게 일깨운다.
간절곶
A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대송리
T 052-204-1000
태화강 국가정원
A 울산광역시 중구 태화강국가정원길 154
T 052-229-3147
암각화에서 창작소까지, 시대를 잇는 울산의 상상력
태화강 상류 대곡천을 따라가면 거북이 엎드린 형상의 반구대에 닿는다. 이곳 절벽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높이 4.5m, 너비 8m 규모의 울산 반구대 암각화가 있다. 바위에 새겨진 선사시대 그림은 육지와 바다 동물을 아울러 총 200여 점에 달한다. 특히 고래 묘사가 압도적이다. 물을 뿜는 북방긴수염고래, 새끼를 업은 귀신고래 등 종류를 식별할 수 있을 만큼 섬세하다. 선사인들이 조직적으로 고래를 사냥하고 해체하는 전 과정을 담은 유적으로는 세계에서 유일하다. 암각화 앞에 서면 시대를 초월한 예술 작품과 교감하는 기분이 든다. 극한의 환경에서도 풍요로운 내일을 꿈꿨던 이들의 원초적인 에너지가 온몸으로 전해진다. 인근의 국내 유일 울산암각화박물관에서는 정밀한 실물 모형과 터치스크린 화면을 통해 현장에서 멀리 보았던 아쉬움을 달랠 수 있다.
반구대 암각화가 선사인들의 흔적이라면, 울산 북구에는 현대 신진 예술가들을 위한 창작공간이 있다. 신천동의 ‘북구예술창작소 감성갱도2020’은 옛 신천동사무소를 리모델링한 복합문화예술공간이다. 어두운 탄광에서 광물을 캐내듯 메마른 일상에서 예술 감성을 발굴한다는 의미와 개관 연도를 이름에 담았다. 이곳은 매년 시각·공연·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작가를 선발해 레지던시를 운영한다. 입주 작가에게는 창작공간과 지원금, 평론가 매칭 등 역량 강화 기회를 제공한다. 작가들은 소개전을 시작으로 연말 결과보고 기획전시까지 개최하며, 지역 공동체와 예술을 매개로 긴밀하게 소통하고 있다.
염포동의 ‘북구예술창작소 소금나루2014’는 시각예술 중심의 전문 창작 지원 공간이다. 과거 소금 포구였던 지역 정체성을 살려, 소금이 물에 스며들듯 예술 에너지를 지역 사회에 전파하겠다는 의지를 이름에 반영했다. 숫자는 정부의 레지던시 지원 사업에 선정된 연도다. 이곳 역시 전국 공모로 동시대 미술을 이끌 우수한 입주 작가들을 발굴한다. 선정된 작가들에게는 개인 스튜디오와 창작활동비, 평론 매칭 등 체계적인 인큐베이팅을 지원한다. 작가들은 봄 소개 전시를 거쳐 가을과 겨울 최종 결과보고전을 개최하며 대중과 호흡한다.
이처럼 울산의 창작공간들은 선사시대의 에너지를 이어받아 현대적 상상력으로 피어나고, 예술가와 지역민은 예술을 통해 소통하며 함께 성장한다. 극한의 환경에서도 풍요를 꿈꿨던 선사인들처럼, 울산은 이제 더 가치 있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