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위한 달리기
글. 반기웅 경향신문 기자
달리기 좋은 계절입니다. 해 질 무렵은 적당히 선선해 기분 좋게 달릴 수 있습니다. 어쩌다 보니 취미 삼아 달리기 시작한 지 4년이 됐습니다. 주로 집 앞 하천변을 달리는데, 종종 마라톤 대회에도 참가합니다. 아무 대회나 참가하는 건 아닙니다. 나름의 기준이 있습니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열리는 대회는 피합니다. 지역에서 열리는 소규모 대회를 선호합니다. 여러 대회가 동시에 열린다면, 조금 더 친환경적인 곳을 선택합니다.
‘친환경 마라톤’을 염두에 두기 시작한 건 환경 분야 취재를 하면서부터입니다. 마라톤 대회에서 적지 않은 쓰레기와 탄소 배출이 발생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마라톤이 끝나면 선수 발자국만 남는 게 아니었습니다. 탄소 발자국도 남습니다.
눈에 띄는 쓰레기는 급수대에서 한 번 사용하고 버리는 일회용 종이컵입니다. 일회용 종이컵은 개당 약 45.2g의 탄소를 배출합니다. 참가자가 물을 5회 섭취하면, 자동차 1km 주행에 해당하는 탄소가 발생합니다. 저도 대회에 나가서 일회용 컵을 쉽게 쓰고 버렸습니다. 부끄럽지만, 엘리트 선수처럼 달리기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흉내 내고 싶기도 했습니다.
일회용 컵뿐만 아닙니다. 페트병과 배번표, 기록 칩, 스타트 라인과 각종 현수막까지. 대회 소품 대부분은 한 번 쓰고 버려지는 일회용입니다. 체온이 오를 때까지 입다가 버리는 일회용 우비와 에너지 젤 포장지도 ‘마라톤 쓰레기’입니다. 따져봤더니, 참가자 5,000명 규모의 마라톤 대회에서 발생하는 쓰레기 무게만 2.5t이라고 합니다. 2016년 기준 국내 마라톤 대회는 370개로, 이 대회에서 나오는 쓰레기는 925t에 달합니다. 최근 러닝 열풍으로 대회 수가 늘었고, 수만 명 규모의 대형 대회까지 감안하면 실제 발생하는 마라톤 쓰레기는 더 많겠지요.
재활용이라도 되면 좋으련만, 현실은 여의치 않습니다. 일회용 종이컵은 플라스틱으로 코팅돼 있어 재활용이 까다롭습니다. 특히 대형 대회는 종이컵에 스폰서 홍보 문구를 인쇄하는 경우가 많아 재활용이 더 어렵습니다. 참가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회 운영 인력이 적다 보니 페트병 분리배출도 쉽지 않습니다.
마라톤 쓰레기 문제가 마음에 걸리던 차에 ‘무해런’이라는 대회를 알게 됐습니다. 올해 2회를 맞은 신생 대회인데, 말 그대로 환경과 사람에 해를 끼치지 않는 달리기를 지향합니다.
일회용 종이컵 대신 세척해 다시 쓸 수 있는 다회용 컵을 쓰고, 물통도 페트병 대신 다회용 물통을 씁니다. 배번표는 기부받은 종이봉투로 만듭니다. 기록 칩은 회수해 다시 사용합니다. 참가자들의 가방과 물품 역시 쓰임이 다한 종이봉투를 활용합니다.
기념 메달도 없습니다. 대신 종이 배번표를 접어 메달 만드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버려진 박스와 기증받은 물감으로 간판과 출발선을 만듭니다. 간식은 도넛인데, 뻥튀기 접시에 담아 제공합니다.
이렇게 치른 대회에서 나온 쓰레기는 얼마나 될까요. 지난해 500여 명이 참가했던 무해런에서 나온 쓰레기는 대형 안내 현수막 단 1개뿐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550명이 참가하는 마라톤 대회에서 배출하는 쓰레기는 종이컵 2,200개를 포함해 약 8,120개라고 합니다.
저 역시 취재를 구실로 2년 연속 무해런에 참가했습니다. 유쾌한 달리기였습니다. 1분 1초 기록을 다투는 대회가 아니다 보니, 가족 단위 참가자들이 많았습니다. 강아지와 어린이, 유아차가 함께 어울려 달렸고, 기발한 분장을 한 참가자들이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해외에는 이미 친환경 마라톤이 자리 잡았지만, 국내에서는 무해런이 처음입니다. 물론 무해런이 달리기 대회의 유일한 정답은 아닙니다. 대회 규모와 예산, 특성이 다른 만큼 모든 대회가 무해런이 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지속가능한 달리기를 고민하는 ‘무해런’의 존재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갖습니다. 벌써 무해런을 본뜬 친환경 대회가 하나둘 생겨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달리기의 계절입니다. 기록 경쟁에 지쳤다면, 이참에 지구를 살리는 무해한 달리기에 동참해 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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