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실종, 설악의 실종
글. 박상현 조선일보 사회정책부 기자
설악(雪嶽)은 산마루에 오래도록 눈이 덮이고, 암석이 눈같이 희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눈이 녹지 않을 정도로 해발고도가 높으며, 암석이 설경처럼 보일 정도로 아름답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날 설악의 빙벽(氷壁)에는 얼음이 없었다. 앙상하게 얼어붙은 두 줄기 폭포수가 이곳이 설악산의 ‘두줄폭포’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해줬다. 예년 이맘때면 암벽이 통째로 얼어붙어서 설악이라는 이름이 걸맞게 ‘눈의 암석’을 볼 수 있던 곳이다. 그런데 얼음이 사라진 것이다.
지난 1월 중순, 취재차 설악산 특수산악구조대의 빙벽 점검에 동행했다. ‘두줄폭포’ 코스는 총 8개의 설악산 빙벽 코스 중 소공원 입구에서 1시간 정도 산을 타면 닿을 수 있는 곳이다. 여름에는 두 줄기로 내려오는 폭포를 감상할 수 있고, 겨울에는 두 물줄기 사이가 얼어 하나의 장엄한 얼음벽을 감상할 수 있다.
빙벽이란 쉽게 말해 폭포가 언 것이다. 그 수직의 암벽이 전부 얼어붙었을 때 인간은 폭포에 온전히 몸을 맞대고 그 시작과 끝을 수직으로 오르내리며 감상할 수 있다. 보통 설악산은 1월 초 폭포 암벽에 30㎝가량 얼음이 붙어 얼고, 얼음이 한파를 만나 단단해지며 1월 14~18일 사이 ‘빙벽 코스’가 정식 개장한다. 그런데 올겨울은 이달 14일까지 얼음 두께가 채 15㎝가 되지 않았다. 얼음 두께를 재는 17㎝ 길이의 스크루가 다 들어가지 않는 포인트가 많았다.
빙벽 형성이 늦어진 것은 올겨울 ‘눈의 실종’과 ‘롤러코스터 기온’이 원인으로 꼽힌다. 설악산에 눈이 쌓이려면 일단 찬 동풍이 상대적으로 따뜻한 동해상을 통과하며 큰 눈구름대가 만들어져야 한다. 이후 동해의 수증기를 머금은 이 축축한 습설(濕雪)이 강원 영동 일대에 이불을 겹쳐놓듯 층층이 쌓이고, 최소 열흘 정도는 영하 10도 내외의 한파가 찾아와 이를 단단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그런데 올겨울 강원 영동에는 눈이 많이 내리지 않았다. 중국 북부지방에 위치한 시베리아 고기압이 확장할 때 찬 바람을 주로 서해상으로 불어 넣었다. 서해상을 통과한 눈구름대가 강원 영동까지 닿으려면 태백산맥을 넘어야 하는데, 대부분 산을 넘지 못하고 영서 지방에서 눈을 소진한다. 이에 속초는 1월 중순까지 적설량이 0이었고, 인제는 3㎝ 안팎의 눈이 세 차례 내렸으나 하루 새 기온이 5~10도가량 널뛰며 미처 얼기도 전에 모두 녹아버렸다. 얼음의 재료가 되는 눈이 적게 내리고, 기온이 영상과 영하를 넘나들다 보니 빙벽이 형성될래야 형성될 수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눈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기상청에 따르면, 1980년대부터 2020년대(2020~2024년)까지 국내 적설량을 분석한 결과, 전국 평균 적설량이 1980년대 38.3㎝에서 2010년대 32.2㎝, 2020년대 21.9㎝까지 줄어든 것으로 확인됐다. 불과 40년 만에 우리나라 눈의 43%가 사라진 것이다.
온난화로 해마다 기온도 빠르게 오르고 있다. 우리나라 평균 기온은 1910년대 12도에서 2020년대 14.8도까지 2.8도 올랐다.
해발고도가 100m 올라갈 때마다 기온이 1도씩 낮아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기간 한반도 설경의 ‘생존 구간’은 약 300m 정도 올라간 셈이다. 기상학적 겨울(일평균 기온이 5도 미만으로 내려간 뒤 다시 올라가지 않은 첫날부터 끝날)도 과거(1912~1940년)보다 최근(1995~2024년) 22일 줄었다. 상고대 등 겨울 설경을 즐길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빙벽 점검을 마치고 내려와 다시 설악산을 바라봤다. 훗날 설악의 산마루엔 더 이상 눈이 쌓이지 않을 것이다. 그날의 설악을 바라보는 이들을 상상하니 마음 한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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