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을 여는 창문,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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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희에게 물었다. 너는 어쩌다 그림을 그렇게 잘 그리게 됐냐고. 영희가 말했다. 내가 보고 싶을 때마다, 외로울 때마다 그림을 그리다 보니 그렇게 잘 그리게 됐다고.”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속 영옥의 독백이다. 극 중 정은혜 작가는 한지민 배우가 연기한 영옥의 쌍둥이 언니이자, 그림 실력이 출중한 발달장애인 ‘영희’로 등장했다. 이 역할은 정 작가에게 반은 맞고, 또 반은 틀리다.
그림을 잘 그리는 건 맞지만, 정 작가에게 그림은 외로움의 산물이 아니라 세상과 이어지는 다리였다. 만화가인 어머니 아래에서 자란 정 작가는 언제나 그림이 가까이에 있었다. 어머니가 운영하던 화실에서 일을 하던 정 작가가 한날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그에게 잡지를 한 장 찢어 건네며 한번 그려보라 했다. 그가 그린 그림에서 재능을 발견한 어머니는 놀랐다. 그렇게 정 작가는 화가로서 세상 밖에 나왔다.
경기도 양평 문호리 리버마켓. ‘니 얼굴’이라는 간판을 달고 앉아있던 그에게 한 사람이 다가와 “여기 얼굴 그려줘요?” 하고 묻자, 정 작가는 이렇게 대답했다. “응! 니 얼굴!” 이 짧고 강렬한 한마디는 정 작가의 시그니처가 됐다. 정 작가가 그린 초상화만 해도 벌써 5,000여 점. 다시 말해 그가 캔버스를 앞에 두고 마주한 사람이 5,000명이 넘는다. 이를 시작으로 사람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농담을 주고받는 재미를 알게 됐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로는 또 다른 전환점을 맞았다. 드라마의 인기와 더불어 정 작가의 팬도 많아졌다. 덕분에 세상과 연결되는 새로운 통로를 발견한 정 작가는, 이제 자신의 이야기를 넘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스며들고 있다.
- 희망을 꿈꾸게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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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인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을까?’ 꿈 같은 질문이었다. 그러나 정 작가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꿈을 현실로 만들어가고 있다. 그는 화가이자 ‘어메이징 아웃사이더 아트센터(이하 아트센터)’의 대표인데, 아트센터를 마련하게 된 이유는 동료들을 위해서였다. 동료들을 향한 애틋한 정 작가의 마음을 그의 아버지 서동일 감독이 대신 설명했다. “지난해 은혜 씨가 포니정 영리더상을 수상했어요. 상금을 어디다 쓸 거냐고 물어보니까 함께 작업하는 발달장애인 작가들에게 밥을 사겠대요. 도대체 몇 끼를 사겠다는 건지(웃음). 마음을 나누고 싶은 거라면, 차라리 함께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보자고 했죠.” 그렇게 탄생한 아트센터에서 정 작가를 비롯해 14명의 발달장애인 작가들이 그림을 그리며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곳은 작가들의 작업실이기 전에 이들의 일터이기도 하다. 경기도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사업에 참여하여 오전 근무시간 동안에는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며, 월급을 받고 있다. 퇴근 후에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아 작품 세계를 펼치고 있다. 즉, 이곳은 그들이 사회인으로서 사회와 연결되는 공간이자, 작가로서 미래를 준비하는 공간인 셈이다.
그림 덕분에 정 작가는 사랑도 찾았다. 함께 활동하던 조영남 작가와 연애를 하다 지난 5월, 결혼식을 올리고 평생을 약속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는 건 평범한 일이다. 그러나 발달장애인 정은혜 작가와 지적장애인 조영남 작가 부부에게는 꿈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가 함께한다면, 두 사람의 세상이 더 넓어질 것이라 확신했다. 두 사람의 행보는 그 자체로 다른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있다.
- 평범하지만 특별한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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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부터 예능 프로그램 <동상이몽2 : 너는 내 운명>, 구독자 30만 명을 자랑하는 유튜브 채널 <니얼굴_은혜씨>까지. 이제 그는 ‘유명인’으로서의 삶을 좀 알 것 같단다. “멀리서 작업실을 찾아와 주시는 분들도 계세요. 제 인기가 좀 많거든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정은혜 작가와 그의 가족이 바라는 건 더 많은 장애인들이 ‘평범’하게 사는 것이다. 매일 아침 일터로 출근해서 동료들과 이야기 나누고, 좋아하는 일을 하고, 퇴근한 뒤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영화를 한 편 보는 그런 삶. 그가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 유튜브 활동을 열심히 하는 이유는 다른 장애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은 이렇게 즐거운 일이라고. 비장애인에게도 말하고 싶단다. 장애인과 마주하는 것은 낯선 일이 전혀 아니라고. 결국, 정은혜 작가가 꿈꾸는 세상은 특별하지 않다. 누구나 자신의 자리에서 일하고 사랑하고 웃을 수 있는 세상. 그리고 그는 오늘도 평범한 기적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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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께서 그린 그림을 처음 보고 부모님이 많이 놀라셨다고요. 재능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셨나요?
사실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엄마 딸이니까요(웃음). 그래서 ‘역시 나는 엄마 딸이구나’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어요.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하니 좋긴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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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얼굴’ 시리즈로 5천 개가 넘는 작품을 그렸어요. 처음 사람 얼굴을 그렸던 때가 떠오르시나요?
양평 문호리 리버마켓에 캐리커처를 그리는 상점으로 참여를 했어요. 앉아있는데 어떤 사람이 “얼굴 그려줘요?”라고 하길래 “응, 니 얼굴!” 하면서 시작됐죠. 처음엔 여름이었어요. 무척 더웠죠. 그런데 같은 자리에서 매일 그림을 그리다 보니 어느새 겨울이 되었어요. 눈이 펑펑 내리는 날에도, 칼바람에 손이 부르텄던 날에도 꾸준히 그림을 그렸어요. 사람들이 제 그림에 관심을 가지며 다가오면 신나요. 제 그림을 받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즐거워요. 지금도 그림을 그릴 때 가장 행복해요. 제가 그린 그림으로 사람들이 저를 생각하고, 기억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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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보면 작가님만의 스타일이 확실해요. 어떤 시선으로 작품을 대하는지 궁금해요.
딱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없어요. 그냥 보이는 대로 그려요. 머리부터 발끝까지요. 사람들이 “은혜 씨, 저 예쁘게 그려주세요.”라고 말하는데 제 눈엔 사람들의 얼굴은 다 예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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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영희’로 연기를 했어요. 어떻게 드라마에 출연하게 되셨나요.
서울에서 개인전을 할 때 노희경 작가님이 찾아오셨어요. 아빠가 만든 다큐멘터리 <니 얼굴>이랑 제 유튜브 채널을 봤대요. 그때 작가님이랑 얘기를 좀 나눴어요. 그리고 드라마 섭외가 됐죠. 2020년에 제주도에서 영희로 연기를 했어요. 감독님이랑 여러 스태프들, 배우들 등 정말 많은 사람들과 함께 했어요. 카메라 앞에서 연기도 하고, 예쁜 옷도 많이 입었죠. 진짜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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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팬도 정말 많아졌어요.
그림 그려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졌어요. 매번 가던 리버마켓에 사람들이 줄을 선 날도 있었어요. 이제 사람들이랑 같이 어울리는 게 즐거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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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활동을 통해 만난 사람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면요?
조영남 오빠(남편)요. 동료 작가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는 공공일자리사업에 참여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오빠를 처음 만났어요. 2024년 2월이었어요. 전혀 모르던 사람이었는데 매일 출근하면 아침마다 커피를 내려 주는데 제가 반할 수밖에 없잖아요. 커피가 진짜 맛있기도 했어요.
지난 5월에 결혼을 했죠. 두려운 건 없었어요. 이제는 오빠가 없는 게 상상이 안 돼요. 요즘에도 오빠랑 꽁냥꽁냥 하는 게 제일 재미있어요. -
작가님의 행보가 함께 활동하는 발달장애인 작가들에게 귀감이 될 것 같아요. 어떤 조언을 해 주시나요?
그런 거 안 해요. 알아서 잘 하는데요 뭘. 말 대신 질투를 하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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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의 활동 계획이 궁금합니다.
연말에 서울에서 <은혜로운 명화전>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전을 할 계획이에요. 전시회를 앞두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많이 찾아와 주시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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