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를 비롯한 첨단산업의 생산시설이 대형화하면서 산업단지를 조성할 때 함께 갖춰야 할 기반시설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넓은 산업용지와 편리한 교통망, 풍부한 인력만으로는 대규모 생산시설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전력이 중요한 입지 조건으로 떠올랐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면서도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물이다.
첨단산업일수록 물이 중요하다
산업단지에서 물은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생활용수와 의미가
다르다. 공장 설비를 돌리고 제품을 만드는 여러 공정에 쓰이며,
경우에 따라 제품의 품질까지 좌우한다. 반도체 공정에는 불순물을
거의 완전히 제거한 초순수가 필요하다. 바이오·제약산업도 수질을
엄격하게 관리해야 한다. 이 밖에도 철강과 전자, 화학 등 여러
제조업에서 물이 생산공정에 사용된다.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의 경우, 산업용수가 공장에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준비가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정부는 여러 댐의 여유
물량을 활용하고 발전·농업용수의 배분을 조정해 하루 65만 톤을
공급할 계획이다. 한국수자원공사는 댐과 광역상수도를 운영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용수 확보와 공급체계 구축을 뒷받침한다.
물만 확보한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다. 수원에서 공장까지 물을
보내려면 취수·정수시설과 관로를 지어야 한다. 반도체 공장이 물을
필요로 하는 시기에 맞춰 이 시설들이 완성되지 않으면 투자
일정에도 차질이 생길 수 있다. 기업 유치계획을 세운 뒤 물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함께 준비해야 한다.
산업용지만으로 기업을 부를 수 없다
그동안 지자체의 기업 유치 경쟁은 주로 부지와 보조금에 초점이
맞춰졌다. 산업단지를 만들고 도로를 연결한 뒤 저렴한 땅과 각종
지원책을 앞세워 기업을 설득하는 방식이다. 산업단지 조성계획이
발표될 때도 몇 개 기업을 유치하고 얼마나 많은 일자리를 만들
것인지가 관심을 받는다.
용수시설은 기업이 입주한 뒤 짧은 시간 안에 마련하기도 어렵다.
물을 끌어올 곳을 정하고 정수시설과 관로를 건설하려면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러 지역과 기관의 협의도
거쳐야 한다. 산업단지를 계획하는 단계부터 입주 업종과 생산
규모를 살피고 필요한 물의 양을 따져야 한다. 기업을 받을 땅과
함께 그 땅으로 이어지는 물길까지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기후변화 시대, 물을 다시 쓰는 법
기후변화는 물을 확보하는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한쪽에서는 폭우가 반복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가뭄으로 댐과 하천의
수위가 낮아진다. 비가 많이 온다고 해서 필요할 때 꺼내 쓸 물이
항상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짧은 시간에 집중된 빗물을 모두 저장해
필요한 시기에 활용하기는 어렵다.
이제는 한 개의 댐이나 하천에만 기대기보다 여러 수원을 연결해
필요에 따라 물을 나눠 쓸 수 있어야 한다. 하수를 깨끗하게 처리해
공업용수로 다시 쓰는 등 기존에 흘려보내던 물을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 기업이 공장에서 사용한 물을 정화해 생산 과정에 다시
투입하면 새로운 수원 개발에 대한 부담도 덜 수 있다.
한국수자원공사의 역할도 그만큼 넓어지고 있다. 댐과 광역상수도를
운영하는 데서 나아가 지역별로 흩어진 물을 연결하고 산업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는 일까지 맡고 있다. 반도체용 초순수 생산기술을
국산화하고 물 재이용을 넓히는 일도 중요해졌다. 물관리가 국민의
일상뿐 아니라 국가 첨단산업을 뒷받침하는 일이 된 것이다.
기업은 공장을 지을 땅만 보고 움직이지 않는다. 그곳에서 오랫동안
생산을 이어갈 수 있는지도 살핀다. 산업용지는 눈에 보이지만
공장으로 이어지는 물길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물이 멈추면
생산라인도 멈춘다. 앞으로 기업 유치 경쟁에서는 얼마나 넓은 땅을
마련했느냐와 함께 그 땅에 필요한 물을 제대로 공급할 수 있느냐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