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의 맛

시간이 빚은 안동의 맛

안동에서는 술 한잔,
음식 한 상에도 지난 시간이 배어 있다.
선조들의 삶과 풍습이 빚어낸 맛이다.

글. 임혜선    사진. 김은주

전통의 맥을 이어 내일로, 진맥소주

맹개마을의 정취는 술 한잔에서 완성된다. 마을의 너른 밀밭에서 직접 기른 유기농 통밀로 빚는 진맥소주다. ‘진맥(眞麥)’은 밀을 뜻하는 말로, 안동에 전해지는 조선 시대 조리서 「수운잡방」에도 밀로 빚은 소주가 등장한다. 진맥소주는 이 기록에서 이름과 영감을 얻어 오늘날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술로, 밀소주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술을 만드는 과정은 밭에서부터 시작된다. 맹개마을에서 직접 재배한 밀을 수확해 발효와 증류를 거쳐 오랜 시간 숙성한다. 진맥소주는 3단 담금과 상압 증류 방식을 사용하며, 제품에 따라 저온에서 장기간 숙성해 밀 특유의 고소한 풍미와 과일·꽃을 연상시키는 향을 끌어낸다. 진맥소주를 만드는 맹개술도가가 ‘씨앗부터 술병까지(Farm to Glass)’를 이야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 병의 술이 이곳의 땅에서 시작해 완성되는 셈이다.

전통을 이어가는 데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숙성 방식에도 도전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진맥소주 원액을 오크통에서 익힌 숙성주다. 아메리칸 오크 배럴에서 최소 2년 이상 숙성하며, 오크 향에 꽃과 과일, 베리류의 향이 어우러지고 마지막에는 스파이시한 풍미가 남는다. 그중 고도수 숙성주인 ‘시인의 바위’는 맹개마을 강변에 자리한 바위 ‘경암(景巖)’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경암은 퇴계 이황이 붙인 이름으로, 이 바위를 바라보며 시 한 수를 읊었다고 전해진다.
씨앗을 뿌리고 밀을 거두는 일부터 한 병의 술을 완성하는 데는 이처럼 긴 시간과 기다림이 필요하다. 옛 조리서에 남은 술의 흔적을 되살리면서도 새로운 방식을 더해가는 진맥소주. 한 잔 안에는 안동의 전통과 맹개마을의 오늘이 함께 익어가고 있다.

씨앗을 뿌리고 밀을 거두는 일부터
한 병의 술을 완성하는 데는 이처럼
긴 시간과 기다림이 필요하다.

제례 문화가 남긴 한 상, 헛제사밥

안동의 오래된 생활 문화를 맛보고 싶다면 헛제사밥을 빼놓을 수 없다. 유교 문화가 깊이 뿌리내린 안동에서는 예부터 집안의 제사와 문중의 의례를 중요하게 여겼고, 자연스럽게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도 발달했다. 제사를 마친 뒤에는 상에 올렸던 음식을 가족과 친지가 함께 나누어 먹었는데, 이러한 제례 문화가 오늘날 안동을 대표하는 향토 음식인 헛제사밥으로 이어졌다.
이름부터 흥미롭다. 말 그대로 실제 제사를 지내지 않고 먹는 ‘헛제사’ 음식이라는 뜻이다. 그 유래를 두고는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제사가 없는 날에도 제사 음식을 먹고 싶었던 사람들이 제사상을 차려 먹으면서 시작됐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옛 유생들이 밤늦도록 글을 읽다 출출해지면 제사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낸 것처럼 한 뒤 함께 나눠 먹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 하나를 정확한 기원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안동의 유교 문화와 제례 음식이 만들어낸 독특한 음식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한 상을 들여다보면 제사 음식의 특징이 고스란히 보인다. 밥에는 고사리와 도라지, 콩나물 등 여러 나물을 올리는데, 일반적인 비빔밥과 달리 고추장 대신 간장으로 슥슥 비벼 먹는다. 제사상에 고춧가루나 마늘처럼 향과 자극이 강한 양념을 사용하지 않는 전통이 반영된 것이다. 여기에 전과 산적, 생선구이 등을 곁들이고 담백하게 끓인 탕국까지 더하면 푸짐한 한 상이 완성된다. 화려하거나 자극적인 맛보다는 재료 하나하나의 맛을 살린 담백함이 헛제사밥의 매력이다.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그 음식을 즐길 수 있다는 이름처럼, 헛제사밥에는 오랜 의례의 흔적과 그것을 일상의 음식으로 이어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함께 담겨 있다. 한 숟가락씩 맛보다 보면 안동의 오래된 음식 문화가 오늘의 식탁까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