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순간

물로 연대를 채우다

조선 수리계의 지혜

글. 강양구 지식 큐레이터

일재 김윤보, <서선농가사시경직실경화첩>
© 국립농업박물관

모내기가 바꾼 농촌의 풍경

수도꼭지를 틀면 나오는 오늘날의 물과 달리, 과거 농경 사회에서 물은 생명줄이자 권력이었다. 누군가는 물을 독점해 권력을 유지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려 했고, 다른 누군가는 물을 함께 쓰면서 동행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반갑게도 조선 시대 보통 사람, 즉 농민은 후자를 실천했다. 바로 조선의 ‘수리계’이다.
논 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풍경이 모내기다. 조선 전기까지 모내기는 보편적이지 않았다. 대신 농민은 논에 씨를 직접 뿌려서 벼를 키웠다(직파법). 이 농사법의 가장 큰 문제는 잡초였다. 논에서 벼와 잡초가 동시에 자라기 때문에, 농민은 여름 내내 논에 엎드려 김매기(잡초 뽑기)를 해야 했다.
이 잡초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바로 모내기, 즉 이앙법이었다. 작은 못자리에서 모를 어느 정도 키우고 나서, 물이 가득 찬 논에 옮겨 심는 방식이다. 물을 깊이 대어두면 잡초의 번식이 억제되기에 네 번 하던 김매기가 두 번으로 줄었다. 못자리에서 모가 자랄 때까지 논에서 보리를 재배할 수 있으니 이모작도 가능했다.
하지만 뜻밖의 반전이 있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조정은 이렇게 장점이 많은 모내기를 금지했다. 모를 옮겨 심는 시기(양력으로 대개 5~6월)에 논에 댈 막대한 양의 물을 공급하지 못하면 그해 농사가 전멸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잇달아 발생하면서 노동력이 급감하고 살아남은 농민은 적은 인력으로 넓은 땅에 농사를 지어야 했다. 김매기 노동을 크게 줄여주는 이앙법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하지만 여전히 물이 문제였다. 바로 그 시점에 등장한 것이 수리계다.

독주항보가 자리했던 만경강 유역

흙으로 막고 약속으로 지킨 물길

수리계는 마을 사람이 물을 공유하고 관리하는 연대 기구다. 일단 모내기가 표준이 되면서 조선의 농촌 마을에서는 안정적으로 물을 확보하고 적시에 물을 대는 일이 중요해졌다. 조정의 손이 닿지 않는 작은 물길은 마을이 스스로 챙겨야 했다. 농사 경험이 풍부하고 마을에서 신망이 두터운 사람이 중심이 되고 물을 쓰는 농가가 계원이 되는 수리계가 만들어졌다.
조선의 수리 시설은 크게 두 가지였다. 골짜기에 둑을 쌓아 빗물을 가두는 제언(방죽)과 흐르는 냇물을 막아 물길을 논으로 돌리는 보(洑)다. 조선 후기 모내기가 퍼지면서 농촌에서는 이러한 수리 시설을 함께 만들고 관리하는 일이 더욱 중요해졌다. 특히 흙과 돌로 만든 시설은 큰물이 지나가면 보수가 필요했기에, 물을 함께 쓰는 농가들이 비용과 노동력을 나눠 관리해야 했다.
수리계의 첫 번째 역할이 바로 이러한 수리 시설을 관리하고 지키는 일이었다. 계원은 소유하거나 소작하는 논의 면적과 수확량에 비례해 돈이나 곡식을 내고, 공사에 필요한 인력을 공급하거나 자신이 직접 나서기도 했다.
물길을 확보하고 나면 이제 분배가 문제였다. 수리계는 논의 크기와 위치에 따라 물 대는 차례를 정해 가능한 한 공정하게 물을 나누려 했다. 물이 넉넉할 때는 느슨하던 차례가, 가뭄이 들면 한 치도 어길 수 없는 약속이 되었다.
공동으로 관리한 물길의 규모는 상당했다. 만경강 유역의 독주항보가 대표적이다. 대한제국 시기 기록을 보면, 이곳의 물로 농사짓는 논은 삼례에서 춘포에 이르기까지 약 1,300헥타르(2만 3,000마지기)에 달했다. 축구장 1,800개쯤 되는 넓이다. 물 덕을 보는 농가는 논 한 마지기(약 560㎡)에 한 말꼴로 물세를 냈다. 한 마을을 넘어 여러 마을이 한 물길에 목숨을 건 셈이다.
사람 사는 세상이니 일탈 행위가 당연히 있었다. 남의 차례에 몰래 수로를 터서 자기 논으로 물을 빼돌리거나, 윗논 주인이 물꼬를 막아 아랫논으로 갈 물을 제 논에 가두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자칫하면 마을 사람 사이에 분쟁이 생기고 수리계가 흔들릴 수도 있는 심각한 일이었다. 수리계는 이런 일을 막고자 징벌 조항을 명시했다.
마을의 규약은 물을 훔친 자를 무겁게 다뤘다. 가벼운 잘못은 마을에 술이나 음식을 내어 사죄하게 했고, 고의로 거듭한 자에게는 더 무거운 벌을 내렸다. 한정된 자원을 공평하게 나누지 않으면 모두가 굶을 수도 있기에 다 함께 살아남고자 했던 공동체의 안간힘이 수리계의 징벌 조항에서 엿보인다.

<화성전도>에 표현된 조선 시대 제언 만석거
Ⓒ 국립중앙박물관

기후위기 시대의 물 나누기

기후위기가 심화되고 반도체와 첨단산업이 성장하면서 물의 역할과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우리는 물을 어떻게 확보하고, 관리하고, 나누어야 할까? 그 해답은 새로운 기술과 시설에만 있는 것일까?
조선의 수리계는 이앙법 같은 기술만으로는 결코 재난을 막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공동체의 약속을 위해 내 논에 물을 가득 채우고 싶은 욕망을 통제하고, 가뭄에도 물 대는 차례를 지키며 사회적 연대를 유지했다.
한정된 물을 나눈다는 것은, 단순한 자원의 분배가 아니라 ‘가뭄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겠다는 공동 선언’이었다. 나만 살아남기 위해 이웃의 물길을 끊는다면 그 마을은 결국 붕괴하고 만다는 옛사람의 지혜는, 물의 가치가 더욱 커지는 오늘날 우리에게 새로운 동행의 방향을 묻는다.

한정된 물을 나눈다는 것은,
단순한 자원의 분배가 아니라
‘가뭄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겠다는
공동 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