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그린 풍경

그리움과 사색의 목적지, 옥천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시인 정지용이
일본 유학 중 향수를 달래기 위해 노래한 시구다.
누군가에게는 짙은 그리움이 있는 곳이자,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깊은 사색의 휴식처가 되어주는 충북 옥천으로 향했다.

글. 박진명    사진. 봉재석

추소정

물길 따라 걷는 그리움 잔잔한 대청호를 곁에 두고
푸른 숲길을 천천히 걷다 보면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과 바람 따라 일렁이는 물결이 반겨오는 곳.
시인의 마음에 오래 머물렀던 풍경을 따라
옥천의 느린 물길 속으로 걸어가 보세요.

위 영상을 통해 강천산 계곡의 힘찬 물소리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부소담악

물 위에 뜬 병풍,
대청호의 비경을 거닐다

사방을 에워싼 산자락의 품으로 들어오자, 창밖으로 스치는 바람마저 서늘해지며 ‘옥천’을 알리는 표지판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온다. 도착하자마자 발걸음을 향한 곳은 환산 아래 연꽃이 물에 뜬 형상의 명당, 옛 이름마저 찬란한 ‘부소무늬’ 마을이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맑고 깊은 물 냄새가 코끝을 스치며 옥천이 숨겨둔 비경, 부소담악(芙沼潭岳)이 그 장엄한 실체를 드러낸다.
한자 뜻 그대로 물가에 피어난 연꽃처럼 대청호 위로 700m 길이로 길게 뻗어 오른 기암절벽이 감탄을 자아내며 한눈에 들어온다. 1981년 대청댐이 준공되며 산자락은 깊은 물속에 잠겼지만, 오히려 그 수면 위로 병풍을 두른 듯한 절경이 피어났다. 조선시대 우암 송시열이 머물며 ‘소금강’이라 찬미했던 그 기품은 세월이 흘러도 바래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여행자의 마음을 훔친다.
이제 발걸음을 옮겨 절벽을 따라 이어지는 탐방로와 데크길을 산책할 차례. 발밑으로는 잔잔한 물결이 찰랑거리고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을 헤치며 한 걸음 내딛다 보면 추소정이라 불리는 정자에 이르게 된다. 잠시 숨을 고르고 호숫가를 향해 시선을 던진다. 정면으로는 대청호가 두 팔을 벌려 감싸 안고 우측으로는 수백 년의 세월을 간직한 소나무 숲이 강을 웅장하게 호위하고 있다. 바람마저 숨을 죽이는 이곳에서 가만히 눈을 감으니, 비로소 진짜 옥천의 여행이 시작된 기분이다.

정지용 생가

실개천에서 대청호까지 이어지는 시인의 길

물에서 물로 이어지는 옥천의 여정. 이번에는 맑은 실개천을 따라 시인 정지용의 생애를 거슬러 올라간다. 마을 인근 야산에서 발원한 실개천이 마을 어귀를 휘돌아 나가고 그 물길을 따라 나지막한 초가집들과 논밭이 한데 어우러진다. 정지용 선생의 생가와 문학관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은 예나 지금이나 실개천을 뼈대 삼아 흐르는 삶의 풍경으로 가득하다. 세월의 변화 속에 겉모습은 달라졌을지라도, 생가 앞을 흐르는 물줄기와 소박한 농경지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의 시 세계가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정지용 선생은 한국전쟁 당시 서울 녹번동 자택에서 제자들과 함께 나선 길 끝에 돌아오지 못한 실종의 비극을 맞이했지만, 그의 문학적 숨결은 고향 옥천에 여전히 짙게 배어있다.
그 흔적은 대표작 <향수>의 이름을 딴 향수호수길에서 선명하게 만날 수 있다. 선사공원에서 시작해 대청호를 따라 굽이굽이 이어지는 총 5.6km의 생태문화 탐방로는 잔잔한 호수와 숲 그늘을 감상하며 걷기 좋은 산책 코스다. 흙길의 감촉을 느끼며 30분 남짓 걷다 보면 길게 뻗은 목교가 인상적인 물비늘전망대와 마주하게 된다. 이곳은 대청호의 푸른 물결을 가장 가까이 눈에 담을 수 있는 정지용의 서정성이 응축된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다.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라고 노래하던 시인의 목소리가 호수의 물결을 타고 들려오는 듯, 대청호의 푸른 물결은 가슴 시린 그리움을 품고 반짝인다.

향수호수길

정지용 문학관

정지용 선생의 생가와 문학관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은
예나 지금이나 실개천을 뼈대 삼아 흐르는
삶의 풍경으로 가득하다.

장령산 숲속동굴

맑은 물이 빚은 숲을 지나 몽환의 빛 속으로

옥천의 깊은 숲과 계곡이 주는 평온함을 찾아 장령산으로 향한다. 장령산은 옥천 일대를 휘감는 금강 유역의 물길을 가르는 울타리이자 마침내 그 물줄기와 만나는 종착점이다. 오랜 세월 주민들의 휴식처를 자처해왔는데, 산책로와 계곡, 숙박시설 등을 갖춘 장령산자연휴양림 덕분이다. 하늘을 향해 쭉 뻗은 소나무들이 뿜어내는 피톤치드가 온몸의 감각을 깨우는 산책로를 거닐 수도, 옥빛으로 반짝이며 맑은 물소리를 토해내는 계곡에 발을 담글 수도 있다. 돗자리를 펴고 앉아 책을 읽거나 가만히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긴 이들의 평화로운 풍경이 물결처럼 번진다.
휴양림의 안쪽 깊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의 목적지인 숲속동굴에 닿기 위해서다. 이곳은 1960년대 중반부터 철광석을 캐며 거친 숨을 내쉬던 동국광산이었다. 1985년 문을 닫은 후 오랜 시간 쓸쓸히 방치됐던 폐광은 색다른 관광 명소로 탈바꿈해 이제 완전히 새로운 시간을 맞이했다. 서늘한 갱도 안으로 발을 딛자 환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알록달록한 조명과 신비로운 미디어 아트가 캄캄한 동굴을 물들이며 마치 오로라 속으로 걸어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형형색색 조명 아래 슬쩍슬쩍 보이는 갱도는 당시 광부들이 철광석을 캐며 파 내려갔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숲길을 걷다 문득 마주하는 이 의외의 볼거리는 땀방울을 식히는 서늘한 쉼터이자 옥천이 가진 새로운 얼굴이다.

숲속동굴 안 소원바위에 걸린 소원

알록달록한 조명과 신비로운 미디어 아트가
캄캄한 동굴을 물들이며
마치 오로라 속으로 걸어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