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반도체의 숨은 조력자가 되다
물은 인류 문명사 내내 그 쓰임을 넓혀 왔다. 지금 이 ‘확장’의
최전선에는 다름 아닌 반도체 산업이 있다. 이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공정 가운데 하나는 실리콘 웨이퍼 위에 회로 패턴을 그리고,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내리는 일이다. 흔히
‘패터닝(Patterning)’이라고 부르는 이 단계에서 ‘물’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로 초순수다.
초순수는 회로 패턴을 그리는 노광과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내는 식각
등 미세 공정 사이사이에 실리콘 웨이퍼를 세정하는 데 사용된다.
극미세 공정에서는 아주 작은 오염물질도 반도체의 품질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불순물을 제거하는 초순수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초순수는 물 분자만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자연 상태의 물과 비교할
때 전기 전도성이 절연체에 가까울 정도로 낮다. 반도체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불순물만 제거하는 최적의 세정수 역할을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류를 포함한 지구 생명의 기원이 되었던 물에는 미네랄을 포함한
온갖 불순물이 녹아 있었다. 하지만 첨단 산업의 물은 이 모든
불순물을 제거한 초순수다. 이렇게 물은 끊임없이 그 모습을
바꾸면서 자기 쓸모를 ‘확장’해 왔다. 그 변화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물이 문명의 영역을 넓혀온 수많은 순간과 만나게
된다.
증기 동력으로 기계를 가동하던 19세기 공장의 모습
물, 대륙을 지배하고
산업 혁명을 일구다
서기 605년, 당시 중국 수나라 양제는 중국 북쪽을 흐르는 황허강과
남쪽을 흐르는 양쯔강을 이었다. 이로써 매년 중국 남쪽의 곡창
지대에서 거둔 막대한 양의 곡물이 강물을 통해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중국 경제의 번영에 핵심 역할을 했다. 이는 물이 생존을 위한
식수라는 한계를 벗어나 공간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확장된 대표
사례다. 물론 대가는 컸다. 대운하를 만들기 위한 노동 착취는
수나라가 몰락하는 중요한 빌미를 제공했다. 하지만 이후 당나라에서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역대 왕조는 시설을 계속 보완해 가며
제국의 영토를 다스리는 용도로 사용했다.
19세기 서양의 산업 혁명에서도 물의 확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산업 혁명 초기만 하더라도 자연 상태의 물을 그대로 활용한 수차가
중요한 동력이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물이 변신을 시도한다. 물을
끓여서 액체에서 기체로 만들면 그 에너지로 피스톤을 밀어낼 수
있다. 바로 증기 기관이다.
이전까지 인류는 물레방아를 돌리고자 반드시 강가에 공장을 지어야
했다. 하지만 물을 끓여 얻은 고압의 증기는 공장을 인간이 원하는
곳 어디든 세울 수 있게 만들었다. 액체의 흐름에 종속되어 있던
산업이, 기체의 팽창 덕분에 원자재와 노동력이 풍부한 대도시
한복판으로 거침없이 확장한 것이다.
대산임해산업지역 해수담수화 시설
물, 기후위기 시대
생명 지킴이가 되다
물의 확장은 이 순간에도 진행 중이다. 초순수를 이용한 미세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 반도체는 인공지능(AI)을 구동하는 데이터센터에도
폭넓게 사용된다. 데이터센터에서 인공지능(AI) 연산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엄청난 열이 발생한다. 그 열을 식히는 중심에 물이
있다. 물은 공기보다 비열(온도 변화에 필요한 열의 양)이 약 4배 커
열을 잘 머금고, 온도도 상대적으로 천천히 변한다. 이러한 특성은
히트 펌프(Heat Pump)를 활용한 냉난방에도 이용된다. 겨울에는
대기보다 따뜻한 물에서 열을 가져와 히트 펌프로 온도를 높여
난방에 활용하고, 여름에는 실내의 뜨거운 열을 냉매로 흡수해 물로
전달해서 식힌다.
수열에너지를 이용한 방식은 전기에만 의존하는 기존의 냉난방과
비교할 때 전력 및 이를 생산하기 위한 화석 연료 등의 에너지
소비를 최대 절반 가까이 절감할 수 있다. 게다가 도시에서 주로
활용하는 공랭식 에어컨의 실외기가 내뿜는 뜨거운 열기를 줄일 수
있어서 도시를 식히는 데도 도움을 준다. 이미 서울 잠실의
롯데월드타워가 이런 방식을 부분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생명의 기원을 이끌어 낸 물은 공간을 지배하고, 산업 혁명의 근원이
되고, 급기야 반도체 같은 첨단 산업의 핵심 조력자로 변신하며 그
가능성을 확장했다. 이제 물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와 도시를 식히고 기후위기를 막는 생명의 지킴이로
거듭나고 있다.
물의 확장은 이렇게 인류의 역사와 함께 계속된다. 다음 확장의
무대는 어디일까. 이미 충남 대산임해산업지역에서는 바닷물에서
염분을 제거해 하루 10만 톤의 산업용수를 생산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해수담수화 플랜트가 가동되고 있다. 바닷물을 새로운
수자원으로 바꾸는 해수담수화에서 물을 분해해 수소를 생산하는
수전해까지, 물의 가능성은 또 다른 영역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물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물의 확장은 이렇게
인류의 역사와 함께
계속된다.
물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