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8일 밤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한 반지하 주택. 기록적인
폭우가 수도권을 덮치던 그 밤 발달장애가 있던 언니와 동생, 그리고
동생의 열세 살 딸이 순식간에 들어찬 빗물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지인에게 침수 신고를 부탁했지만, 관악소방서는 이미
산사태와 하천 범람 대응으로 모든 차량이 출동한 상태였다. 인근
구로와 양천소방서가 지원에 나섰지만, 배수 작업을 마친 뒤 이들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같은 날 밤 강남역 일대는 도로가
강처럼 변했고, 침수된 길을 건너던 남매가 맨홀 뚜껑이 이탈한
곳으로 휩쓸렸다. 이런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어떻게 대한민국에서
이런 사고가 발생할 수 있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4년이 지난 지금, 서울 강남·서초·관악·동작·영등포·구로 6개구는
다른 풍경을 갖게 됐다. 올해 6월부터 시행된 ‘도시침수경보’ 체계
덕분이다. 침수 가능성이 예측되면 ‘침수주의보’가, 실제 침수가
발생했거나 확실시되면 ‘침수경보’가 발령돼 주민의 휴대전화로 곧장
전달된다. 관계기관 자료를 실시간으로 연계해 현재 위치가
침수우려지역인지 확인할 수 있고, 서울시와 자치구, 경찰, 소방은
예보 발령과 동시에 현장조치 매뉴얼에 따라 취약지역 주민 대피와
배수시설 가동에 나선다. 신림동과 강남역의 비극이 있던 바로 그
장소들이, 이제는 위험을 몇 분 앞서 알리는 시스템의 첫 시험대가
된 셈이다.
도시침수경보도, 폭염중대경보도,
열대야주의보도 과거의 희생자를
되살리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 경보들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미래의 피해자는 구할 수 있다.
그것이 이 더딘 진보가 가진
분명한 쓸모다.
돌아보면 올해는 유독 이런 변화가 몰린 해였다. 기상청은 18년 만에
폭염특보 체계를 전면 개편해, 기존 주의보·경보 2단계에
‘폭염중대경보’라는 최상위 단계를 신설했다. 체감온도 38도 이상이
예상되면 발령되는 이 경보는 신설 두 달 만인 7월, 경북
포항·경산에 처음 발효됐다. 야간 더위의 위험성을 알리는
‘열대야주의보’도 22년 만의 특보구역 세분화, 재난성 호우에 대한
긴급재난문자 신설과 함께 도입됐다. 물과 더위, 서로 다른
재난이지만 같은 해에 나란히 새 이름표를 달았다. 폭염중대경보가
발령되면 고령자 등 취약계층은 하루 두 차례 안부를 확인받고, 노인
일자리 참여자의 실외 활동은 전면 중단된다. 경보 하나가 실제
현장의 대응 방식까지 바꿔놓은 셈이다.
이 모든 제도의 배경에는 숫자가 있다. 온열질환 감시체계가 가동된
2011년 이후 지난해까지 누적 사망자는 238명, 성별로는 남성이
145명, 여성이 93명이었다. 연령대로는 60세 이상이 65.5%(156명)를
차지했고, 발생 장소는 논밭이 31.9%로 가장 많아 땡볕 아래 일하던
고령 농민들의 피해가 두드러졌다. 역대 최악의 폭염이었던
2018년에는 한 해에만 48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난해에도
온열질환자는 전년 대비 31.4% 늘어난 3,704명에 달했고, 사망자
34명 가운데 82.4%는 실외에서, 94.1%는 열사병으로 발생했다.
건설현장과 급식실 에어컨 설치 현장, 논밭 등에서는 해마다
폭염으로 인한 안타까운 사고가 반복되고 있다.
취재를 거듭할수록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꼭 어떤 계기가 있어야만
세상이 바뀌는 걸까. 신림동에서 발생한 안타까운 사고와
논밭·건설현장에서 누적된 30여 명의 인명 피해가 없었다면 이
경보들은 여전히 만들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 사실이 못내
씁쓸하다. 우리 사회는 늘 사람이 먼저 대가를 치른 뒤에야 제도가
뒤따르는 방식으로 진행돼 왔다. 반지하 주택은 여전히 서울 곳곳에
남아 있고, 물막이판과 배수펌프가 지급됐다는 소식에도 주민들의
불안은 가시지 않는다. 제도의 속도가 삶의 절박함을 완전히
따라잡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더딘 변화를 냉소하지 않기로 했다. 참사가 경보
체계 신설로 이어지고, 사망자 수치가 특보 기준을 바꾸는 이 느린
변화야말로 우리 사회가 재난과 씨름해온 유일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도시침수경보도, 폭염중대경보도, 열대야주의보도 과거의
희생자를 되살리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 경보들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미래의 피해자는 구할 수 있다. 그것이 이 더딘 진보가 가진 분명한
쓸모다.
기자로서 앞으로 할 일은 정해져 있다. 다음 폭우와 다음 폭염이
오기 전에, 지금 만들어진 이 경보들이 실제로 현장에서 작동하는지,
문자 한 통이 정말 누군가의 대피 시간을 벌어주는지, 안부 확인
전화 한 통이 정말 고령자의 목숨을 지켜주는지 확인하는 것. 세상이
바뀌는 데 계기가 필요했다면, 그 계기를 헛되이 만들지 않는 것이
취재현장에 서 있는 우리의 몫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