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의 맛

뿌리 깊은
순창의 맛

섬진강의 맑은 물과 산이 품은 기운 그리고 기다릴 줄 아는 인내는 순창만의 고유한 맛을 만들었다.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오롯이 시간을 견뎌낸 순창의 멋과 맛을 소개한다.

글. 박진명    사진. 봉재석

고추장 불고기

자연의 순리대로 익어가는 순창의 별미

‘왕의 진상품’이라 일컫는 고추장의 고장, 순창. 이곳의 명성은 예나 지금이나 독보적이다. 고려 말, 무학대사를 찾아 길을 떠났던 이성계가 우연히 들른 순창의 한 민가에서 맛본 고추장의 깊은 풍미에 감탄했고, 왕이 된 이후에도 그 맛을 잊지 못해 진상토록 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영조가 유독 총애했다는 조종부 집안의 고추장에 얽힌 <승정원일기>의 기록이나, 고유의 비법을 상세히 담은 <규합총서>, <소문사설> 같은 문헌들이 순창 고추장의 역사와 명성을 증명한다.
순창의 맛이 이토록 깊고 그윽한 데는 분명 자연의 깊은 배려가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은 일교차를 키우고 적당한 습도를 유지하며, 발효를 돕는 유익한 균들의 요람이 되어준다. 여기에 섬진강 상류의 맑은 물과 산마루를 타고 내려오는 청정한 공기가 더해지니, 이곳의 장은 다른 지역이 흉내 낼 수 없는 깊은 맛을 지니게 된 것이다.
순창의 발효 미학이 정점에 달한 음식이 바로 고추장 불고기다. 콩의 구수한 풍미와 고춧가루의 칼칼한 맛은 고기의 잡내를 비워내고 입안에는 오직 깔끔한 여운을 남긴다. 순창의 흙에서 얻은 매실청과 잘 익은 집된장을 넣어 고기를 씹을수록 감칠맛이 배가 된다. 오랜 시간 땅의 기운을 머금고 익어온 양념은 그 자체로 이 땅의 기운을 닮았다. 고기 한 점을 맛보는 순간, 긴 기다림 끝에 완성된 깊은 숙성의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순창식 곰탕

장의 고장에서 만난 가장 뜨거운 고백

전남에 ‘나주식 곰탕’이 있다면, 전북에는 그와 결이 다른 ‘순창식 곰탕’이 존재한다. 장류의 고장이라는 명성답게 이곳의 곰탕은 깊은 장 문화의 토대 위에 탄생했다. 맑고 뽀얀 국물을 고집하는 대신, 고추장의 은은한 매콤함을 풀어내어 식욕을 돋우는 붉은빛의 풍미를 완성한 것이다. 설렁탕의 진한 고기 육수에 육개장의 칼칼함과 곰탕의 푸짐한 고기 건더기까지 한 그릇에 모두 담아냈다. 시간과 정성을 묵묵히 고아낸 국물의 진한 향기는 이곳이 왜 장의 고장인지를 증명한다. 부드러운 고기 사이로 아삭하게 씹히는 고사리와 콩나물, 그 위에 흩뿌려진 들깻가루의 고소함은 숟가락을 멈출 수 없게 만든다. 순창의 시간과 자연이 빚은 소박하지만 특별한 한 그릇은 여행자의 허기를 달래기에 부족함이 없다.

다슬기국

강과 산을 품은 초록빛 다슬기

섬진강 상류의 맑고 차가운 물길이 키운 다슬기는 예부터 ‘강에서 나는 보약’이라 불렸다. 껍데기째 오랜 시간 공들여 끓인 국물에는 강물의 푸른 생명력이 담겼다. 그 맑은 초록빛의 국물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지친 속이 서서히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쫄깃하게 씹히는 다슬기 살점은 고소함과 쌉쌀함 사이를 오가며 미각을 깨우고 시원한 국물은 강물의 투명함을 입안 가득 퍼뜨린다. 여기에 제철을 맞아 싱그럽게 오른 부추나 아욱, 팽이버섯 등을 더하면, 자연의 정수를 담은 한 그릇의 보양식이 완성된다. 탕이나 칼국수, 수제비 등으로 변주되는 다슬기 요리에는 순창이 품은 산과 강의 생명력이 옹골차게 녹아 있는 셈이다.

순창의 맛이 이토록 깊고 그윽한 데는
분명 자연의 깊은 배려가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은
일교차를 키우고 적당한 습도를 유지하며,
발효를 돕는 유익한 균들의
요람이 되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