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그린 풍경

이토록 완벽한 피서지,
순창

호남정맥의 산세가 마을을 감싸고 굽이마다 섬진강의 물길이 너울거리는 고장, 전북 순창.
깊은 산중 얼음장 같은 계곡을 따라 완벽한 피서지의 면모를 찾아 나섰다.

글. 박진명    사진. 봉재석

숲을 깨우는 여름의 소리 바위를 타고 힘차게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숲의 정적을 깨우고,
물장구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푸르른 녹음 아래로 흩어지는
완연한 여름의 한낮에 귀 기울여 보세요.

위 영상을 통해 강천산 계곡의 힘찬 물소리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구암사

숲이 길러낸 지혜의 안식처

내장산국립공원에 속한 백암산 중턱에 닿자 지금이 한여름이라는 사실이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숲이 내어주는 서늘한 바람이 온몸을 휘감고 산중의 깊은 고요가 귓가에 맴돈다. 꼬불꼬불 이어진 산길 끝에서 마침내 천년고찰 구암사가 소박하고 고즈넉한 자태를 드러낸다. 사찰 아래를 둘러싼 석축은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섬처럼 속세와 단절된 풍경을 만들어낸다.
거북(龜) 바위(巖)라는 이름처럼 구암사는 영험한 기운을 품고 있다. 대웅전을 받치는 암거북 모양의 지반과 동편의 숫거북 바위, 신령스러운 거북의 형상을 닮아 ‘영구산(靈龜山)’이라 불리는 산자락이 그 이름을 뒷받침한다.
사찰 아래 우뚝 선 36m 높이의 은행나무는 구암사의 1400년 역사를 말없이 지켜온 존재다. 조선 건국 당시 무학대사 자초가 태조의 안녕과 왕조의 번영을 기원하며 심었다고 전해지는 이 나무는 지금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구암사는 내장사와 백암사 사이에서 오랜 세월 학승들의 요람이자 지식의 산실 역할을 했다. 추사 김정희와 백파 긍선, 초의선사가 서간으로 학문을 논했고, 이후에는 만해 한용운을 비롯한 수많은 문인이 이곳을 찾았다. 굽은 산길 끝에서 만나는 구암사는 시대를 관통한 지혜가 고요히 머무는 공간이다.

병풍폭포

여름의 한가운데서 만난 청량한 기운

아스팔트의 뜨거운 열기를 뒤로하고 닿은 두 번째 목적지는 강천산군립공원이다. 울창한 녹음과 쉼 없이 흐르는 물길이 어우러진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군립공원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위엄을 간직하고 있다. 강천산에는 연대봉과 왕자봉, 선녀봉 세 개의 봉우리가 중심이 되어 크고 작은 물길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단단한 암반 위로 맑은 샘물이 솟아난다’는 지명처럼 마치 두 마리 용이 굽이치며 승천하는 형상을 닮아 예부터 ‘용천산’이라 불리기도 했다. 계곡을 따라 평탄하게 이어진 흙길과 정갈한 나무 데크가 번갈아 나타나는 산책로는 거친 숨을 몰아쉬기보다 천천히 자연의 호흡을 따라 걷기에 더할 나위 없다.
산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하는 병풍폭포는 예고 없는 선물 같다. 푸른 녹음에 시선을 빼앗긴 찰나, 갑작스레 쏟아지는 백색 물줄기는 뜻밖의 환대처럼 느껴진다. 고개를 한껏 젖혀야만 끝이 보이는 거대한 바위 절벽, 그 틈 사이로 비단길 같이 쏟아지는 물줄기는 숲의 정적을 단번에 깨뜨린다. 길을 따라 메타세쿼이아가 만든 거대하고도 짙은 그늘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길가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더위를 식히는 이들의 웃음소리가 숲의 고요와 어우러진다. 물장구를 치며 여름의 한낮을 만끽하고 나무 그늘에 앉아 흐르는 물소리를 벗 삼은 장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더위가 한층 가시는 기분이 든다.

요강바위

물의 무한한 에너지가 깃든 곳

물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바위 틈을 뚫고 흐르는 가느다란 물줄기에서 시작해 거대한 폭포를 이루고, 마침내 바다와 구름으로 이어지는 물은 스스로 형태를 고집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자신의 경계를 넓혀간다. 그러한 물의 본질,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기는 경이로움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장군목유원지다.
동계면 어치리에 들어서면 강물 위로 장판처럼 넓게 펼쳐진 바위들이 압도적인 풍경을 만든다. 그 한가운데 장군목의 상징인 요강바위가 자리한다. 누군가 정교하게 깎아 놓은 듯한 이 둥근 구멍은 ‘포트홀(pothole)’, 우리말로는 ‘돌개구멍’이라 불린다. 오랜 세월 물이 모래와 자갈을 품고 쉼 없이 회전하며 바위를 깎아 만든 자연의 작품이다.
수천, 수만 년의 시간을 견뎌 탄생한 이 바위 앞에 서면 물의 한계를 묻던 질문은 어느새 사라진다. 단단한 바위를 부드러운 곡선으로 바꾸는 물의 흐름은 가장 강인한 인내를 보여준다.
마을 사람들도 이 바위를 평안을 비는 성스러운 터로 여겼다. 아이를 간절히 바라던 여인들이 기도를 올렸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주민들이 몸을 숨기는 곳이 되기도 했다. 요강바위는 오랜 세월 물의 흔적과 사람들의 삶을 함께 품어온 공간이다.

장군목의 현수교

단단한 바위마저 제 품에 안아 기어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만드는 물의 흐름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강인한 인내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