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해동지도에 표시된 국제 무역항 벽란도
Ⓒ 국가유산청
물길을 읽은 고려, 세계와 만나다
한국의 영어 명칭 ‘Korea’는 애초 외국인이 고려를 불렀던
‘Corea’에서 유래했다. 고려 시대에 아라비아 상인까지 한반도의
서해 뱃길을 들락거렸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고려의 존재가
서남아시아(중동)를 넘어서 멀리 북아프리카와 서유럽까지 알려졌다.
그 핵심에는 지금의 개성 근처 북한 예성강 하류에 있었던 무역항
벽란도가 있었다.
사실 서해안은 수심이 얕고 밀물과 썰물이 들어올 때의 차이가
심해서 동해안이나 남해안과 비교했을 때 항구로 적합하지 않다는
통념이 있다. 벽란도가 있었던 예성강 하구로 이어지는 물길도
만조(밀물) 시 수위가 최대 8m까지 상승하고 간조(썰물)가 되면
급격히 낮아져 바닥이 드러나기 때문에, 대형 선박이 물길을 잘못
읽으면 갯벌에 좌초되기 십상이다. 놀랍게도 고려인은 이 위험천만한
물길을 ‘시간’을 이용해 통제하는 요령을 익혔다. 만조가 시작할 때
그 거대한 강물의 흐름에 배를 얹어 수도 개경(개성)의 관문
벽란도까지 쉽게 진입하게 했다.
그렇게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는 물론 멀리는 중동에서 온 배들은
수은, 유황, 그 지역 향료(침향), 산호 등을 내리고 고려 인삼,
나전칠기, 고려청자, 종이 등을 싣고서 썰물이 시작할 때 물이
빠지는 힘을 이용해 바다로 나갔다.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
바람의 비밀을 해독한 대양의 정복자들
오늘날 세계 지도를 다시 쓰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대항해 시대를
가능하게 한 것도 바다의 거대한 물길 덕분이었다. 바스코 다 가마는
유럽의 서쪽 끝 포르투갈에서 출발해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
유럽 최초로 인도 항로를 개척했다. 동아프리카에서 인도의
캘리컷까지 단 23일 만에 도착했는데, 돌아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순풍을 받지 못해 인도양을 빠져나가는 데에만 132일이 걸렸던
것이다.
이후 포르투갈은 인도 항로를 철저히 계절풍 주기에
맞춰 이용했다. 매년 2~3월 리스본을 출발해 7~8월의 남서풍을 타고
인도 서해안의 고아까지 갔다가, 돌아올 때는 12~1월의 북동풍을
이용했다. 그 결과 인도와 동남아, 일본까지 이어지는 국제무역망을
최초로 구축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이르는 무역패권을 쥐었던 힘은
바로 물길을 읽고 똑똑하게 이용하는 데에서 나왔다. 이후 스페인과
네덜란드도 이 항로를 따라 대항해 시대를 열었고, 조선에 표류했던
하멜과 박연 역시 이 길을 거쳤다.
인도 캘리컷에 도착한 바스코 다 가마
좁은 물길 하나로 국가의 운명을 바꾼 싱가포르
오늘날 동남아시아의 부국으로 손꼽히는 싱가포르의 성공 뒤에도
물의 힘이 있었다. 싱가포르는 말라카 해협과 싱가포르 해협이라는
전략적 물길을 적극 활용해 세계적인 물류·금융 허브로 성장했다.
1965년 말레이시아에서 반강제적으로 독립했을 당시만 해도 땅도
자원도 없는 가난한 섬나라의 미래는 암울해 보였고, 많은 이들이
수십 년 안에 몰락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섬 사이에 있는 말라카
해협은 길이 약 900km의 천연 수로이며, 남쪽 끝 싱가포르 해협에
이르면 배가 지나갈 수 있는 항로의 너비가 약 2.8km로 좁아진다.
독립 싱가포르를 이끌었던 리콴유는 이 좁은 물길의 지정학적 가치를
극대화했다. 싱가포르 앞을 지나는 유조선과 화물선에 급유와 수리
서비스를 제공하고, 주롱섬에 대규모 정유 공장을 세워 중동산
원유를 부가가치 상품으로 재수출하는 전략을 펼쳤다.
불과 반세기 만에 인구 600만 명의 도시 국가 싱가포르가 1인당 GDP
최상위권의 금융·물류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싱가포르
해협을 전략적으로 활용한 선택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말라카 해협
싱가포르 해협
실리콘 문명을 적시는 물
21세기에 물은 디지털 패권도 뒷받침한다. 뜻밖에도 인공지능(AI)
시대에 물의 힘이 더욱더 중요해졌다. 반도체 공장이 들어설 지역을
놓고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입지 조건 가운데 하나는 충분한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지이다. 최근 인공지능(AI) 사용의
확산으로 중요성이 커진 데이터센터의 냉방에도 물이 필요하며,
반도체 제조 공정에도 초순수는 필수적이다.
고려 벽란도에서 ‘Corea’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운 물의 힘은 차가운 실리콘 문명을 지탱하는 데에도 여전히
중요하다. 21세기 대한민국 번영의 지속 가능성을 따져 묻는 데에
필수인 물. 이 물을 둘러싼 힘겨루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벽란도의 뱃사공이 밀물과 썰물의 시간을 읽었듯, 오늘 우리에게도
물의 흐름을 읽고 지키는 지혜가 필요하다.
뱃사공이 밀물과 썰물의 시간을 읽었듯,
물의 흐름을 읽고 지키는 지혜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