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 한지박물관
Q. 3대째 한지를 만들고 계십니다.
가업을
잇게 된 계기가 있나요?
사실 특별히 ‘내가 한지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은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공장을 옮겨 다니며
자연스럽게 한지 만드는 일을 봤고, 초등학교도 다섯 군데나
다녔습니다. 20대에도 계속 이 일을 했고, 30대가 되니 다른 길을
찾기도 쉽지 않았죠.(웃음) 그렇게 흘러가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돌이켜보면 가업이라는 책임감도 있었고, 무엇보다 고지식하게 한
길만 걸어온 성격 덕분에 지금까지 이어온 것 같습니다.
Q. 한지를 만들 때 물이 중요하다고
하던데요.
한지는 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예부터 한지장은 물을
찾아다닌다고 했죠. 선조들은 항상 마르지 않는 계곡과 샘을 찾아
공방을 세웠습니다. 좋은 한지를 만들려면 무엇보다 맑고 신선한
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한지는 물, 닥나무, 그리고 장인의 손길이 함께 만들어내는
결과물입니다. 음식도 좋은 물로 제때 만들어야 맛있듯이 한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닥나무를 벤 뒤 바로 삶고 씻고 풀고 뜨고 말리는
모든 과정이 신선하게 이루어져야 좋은 한지가 나옵니다. 저는
이를 두고 “한지가 맛있게 익는다”고 표현해요. 그래서 저는 늘
물이 가장 중요한 재료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괴산의 물로 세척한 닥나무 껍질
Q. 좋은 한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연을 잘
살펴야겠습니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물 성분을 분석하는 장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인들이 직접 자연을 관찰해야 했어요. 주변 계곡의 물이 깨끗한지, 돌에 어떤 색이 끼어 있는지, 철분이나 석회 성분은 없는지 눈으로 살폈습니다. 실제로 물에 철분이 많으면 한지에 붉은 점이 생기기도 합니다. 좋은 한지를 만들려면 좋은 물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선조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연을 자세히 살피는 눈이 곧 장인의 기술이었습니다.
Q. 한지를 만들며 가장 힘들었던
시절은
언제였나요?
지금도 한지 제작은 쉽지 않지만, 제가 젊었을 땐 지금보다 제작 환경이 더 열악했어요. 예전에는 전국에서 닥나무 껍질을 수집해 삶아야 했는데, 땔감이 부족해 폐타이어까지 태우며 작업했습니다. 큰 가마솥에 수 톤씩 닥나무를 삶다 보면 온몸이 그을음으로 새까매졌죠. 아무리 씻어도 손가락 마디 사이까지 검댕이 남아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 시절에는 “빨리 돈 벌어서 88올림픽 구경 가자”며 버텼는데, 막상 올림픽이 열렸을 때도 구경 갈 여유가 없었습니다.(웃음) 그렇게 하루하루 일하다 보니 어느새 한 세대가, 또 한 세대가 흘렀네요.
한지로 만든 공예품들
Q. 전통을 지키면서도 한지의 현대화를 시도해 오셨습니다.
전통 방식만 고집해서는 한지가 살아남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1970~80년대만 해도 전국에 한지 공장이 100곳 가까이 있었지만,
지금은 손에 꼽을 정도로 줄었습니다. 창호지나 벽지처럼 전통적인
용도만으로는 소비가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죠.
그래서 색을 다양하게 넣고, 천연 재료를 활용하고, 예술가들이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질감의 한지를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맞는 새로운 한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전통을 지키되 새로운 길도 찾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만드는
새로운 한지도 수백 년 후에는 또 하나의 전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문화재 복원
작업에 한지장님의 한지를 사용하고 있다고 하던데요.
세계 시장에서 한지의 경쟁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한지는 오래갑니다. 흔히 ‘지천년 견오백(紙千年 絹五百)’이라고
하지요. 종이는 천 년, 비단은 오백 년 간다는 뜻입니다. 시간이
지나도 한지 특유의 질감과 느낌이 살아 있고 보존성이 뛰어나죠.
해외에서도 “물에서 건져 만든 종이가 천 년을 간다”는 사실
자체를 굉장히 놀랍게 생각하더라고요.
앞으로는 ‘한국의 한지’가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날이 머지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 과정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고요.
한지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한지들
Q. 대중들을 위한 한지 문화 체험에도 힘쓰고 계신데,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으신가요?
유치원에서 한지 만들기 체험을 하러 올 때가 있는데요. 처음에는
하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손에 물 묻는 것이 싫어 울기도
하죠. 그런데 막상 자기 손으로 한 장의 종이를 만들어 보면
표정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엄마, 이걸 어디에 붙일까? 창에
붙일까, 전등에 붙일까?” 하며 너무 좋아합니다.
지금은 어린아이지만 그 아이가 자라 한지의 소비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험 하나가 한지를 알리는 씨앗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Q. 앞으로 한지의 명맥을 이어가는
일에 대한
고민도 있으실 것 같습니다.
물론입니다. 전통은 혼자 지킬 수 없습니다. 기술을 배우고 이어갈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한지를 만드는 기술뿐 아니라 한지가 왜
중요한지,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함께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오랫동안 함께해 온 이수자도 있고, 요즘은 제 딸아이도
체험 프로그램 행사를 도우며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물속에 있는 닥나무 섬유를 건져 올리는 물질
Q. 평생 한지를 만들어 오셨는데요.
지금도
한지에 감탄하는
순간이 있나요?
저는 한지를 볼 때마다 참 신기합니다. 물에서 건져낸 종이가 천 년을 간다는 것 자체가 놀랍잖아요.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포근하면서도 질깁니다. 한지의 이런 모습이 어쩌면 제 삶과도 닮은 것 같습니다. 오래 버티고, 견디고, 이어온 시간이요.
Q.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한지를 대중화하려면 결국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가끔은 컴퓨터 대신 한 장의 한지를 꺼내 손글씨로 편지를 써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실천이지만 한지를 사용하는 문화가 살아나는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전통문화를 우리가 먼저 알고 아껴야 세계도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Q. 마지막으로 한국수자원공사에
바라시는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한지의 시작에는 늘 물이 있습니다. 농경문화도, 전통문화도, 우리의 삶도 결국 물에서 시작됐습니다. 물이 없으면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한지와 물은 앞으로 천 년, 이천 년이 지나도 함께 이어져야 할 소중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물로 한지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앞으로도 깨끗한 물을 잘 관리해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