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그린 풍경

푸른 바다에 스며든 천 년의 숨결

서산(瑞山)에
마음을 기대다

발길 닿는 곳마다 그림이 되고, 머무는 곳마다 위로가 되는 땅이 있다. 하루에 두 번 바다가 길을 내어주는 신비로운 암자부터, 굽이진 산길 끝에 조용히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천년 고찰까지,
충남 서산이 건네는 다정하고도 깊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이지혜 사진 봉재석

풍요로운 서해 바다 하루에 두 번
바다가 길을 내어주는 신비로운 암자로 가는 길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위 영상을 통해 간월도까지 닿는 길을 열어준 바다의 소리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간월암

기적이 일상이 되는 곳, 간월도

오후 늦게 도착한 서산시 부석면의 간월도(看月島).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지만, 그 흐린 날씨조차 간월암이 뿜어내는 특유의 분위기를 가리지는 못했다. 간조와 만조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섬이 되었다가 뭍이 되는 이곳은, 도착한 시각 마침내 바다가 양옆으로 갈라지며 걷기 좋은 길을 내어주고 있었다.
바다 한가운데로 난 젖은 길을 걸어 암자로 들어선다. 마치 바다 위를 걷는 듯하다. 조선 초 무학대사가 천수만에 비친 달빛을 보고 깨달음을 얻어 창건했다는 이 작은 암자는 바다 한가운데서 거친 파도를 묵묵히 견뎌낸다.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수행하며 어리굴젓을 태조 이성계에게 진상했다는 오랜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조선 말엽 잠시 폐사되었던 것을 1914년 만공 스님이 다시 창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마당에는 200년 된 사철나무가 암자의 굴곡진 역사를 증명하듯 우뚝 서 있다.
멀리서 간월암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전망대를 걷다 보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거운 구름이 기어코 굵은 비를 뿌렸다. 비를 피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봤지만, 서해의 바다는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변덕스러웠다. 어느새 빗줄기가 잦아들며 잿빛 구름 틈새로 해가 얼굴을 내밀더니, 바다 위로 선명한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해 질 녘, 붉고 보랏빛으로 물드는 노을이 간월암의 실루엣을 짙게 감쌌다. 썰물로 드러난 갯벌과 바다, 그리고 암자가 어우러진 낙조는 시시각각 색을 바꾸며 완성되었다. 날씨의 변화가 만들어낸 우연한 풍경 앞에서 한참 동안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경내를 걷다 보면,
일상에서 얽혀 있던
복잡한 상념들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마음을 여는 숲속의 안식처, 개심사

운산면 상왕산(象王山) 자락 깊숙한 곳에 안긴 개심사(開心寺). ‘마음을 여는 절’이라는 직관적인 이름에 이끌려 목적지로 삼았으나, 사찰의 본 모습과 마주하기 위한 진입로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입구에서 시작되는 가파른 돌계단을 500미터 남짓 올라야 한다. 여름날의 무더위 속에서 이마에 맺히는 땀을 닦아내며 묵묵히 차오르는 숨을 고르다 보면, 짙푸른 숲 사이로 이내 단아하고 절제된 사찰의 윤곽이 모습을 드러낸다.
혜감국사가 백제 의자왕 14년(654년)에 창건한 이 절은 본래 개원사(開元寺)라 불리다가, 고려 시대에 이르러 지금의 개심사로 명칭을 변경했다. 경내로 들어서는 초입에는 백제 시대 정원 양식의 원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직사각형 모양의 연못, 방지(方池)가 여행자를 맞이한다. 수면에 비친 나무 그림자를 보며 그 위를 가로지르는 좁은 외나무다리를 조심스레 건너면 사찰의 중심 구역으로 이어지는 해탈문(解脫門)에 닿는다. 정면이 아닌 안양루 옆 측면으로 진입하도록 설계된 동선은 방문객이 대웅보전을 비롯한 건축물의 입체적인 배치를 단번에 조망하게 만드는 독특한 건축적 장치다.
사찰의 중심을 잡고 있는 대웅보전(보물 제143호)은 1484년 조선 성종 때 건립된 다포계 양식의 명작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그 곁에 자리한 요사채, 심검당(尋劍堂)이다. 심검당은 개심사가 지닌 건축적 미학의 정수라 할 만하다. 화려한 단청으로 치장하거나 인위적으로 곧게 가공한 목재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산세에서 자라난 듯 자연스럽게 휘어지고 굽은 나무 기둥의 형태를 훼손 없이 살려 건물의 뼈대를 엮었다. 인위적인 개입을 최소화한 전각은 마치 숲의 나무가 건물로 자라난 듯 작위가 묻어나지 않는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경내를 걷다 보면, 일상에서 얽혀 있던 복잡한 상념들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기교 없이 지어진 고찰 특유의 압도적인 고즈넉함 속에서, 심검당 툇마루에 걸터앉아 상왕산을 스치고 지나가는 마른바람 소리를 한참 동안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