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순간

빛을 품고 시간을
흐르는 물의 연대기

강양구 지식 큐레이터

단양 도담삼봉

조선의 시간을 움직인 물

2021년 6월 초, 서울 도심 인사동 피맛골의 재개발 지구에서 조선 시대 유물이 대거 발굴되었다. 그 가운데는 15세기 세종대왕이 한글을 발명할 즈음에 쓰인 것으로 짐작되는 금속활자 실물 등이 포함되어 눈길을 끌었다. 그곳에서 함께 나온 유물 중 동으로 만든 구멍이 뚫린 판 조각이 있었다. 그 정체는 자동 물시계의 핵심 부품이다.
1434년(세종 16년) 세종의 총애를 받던 장영실, 김빈 등은 자동 물시계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었다. 이전에도 물시계가 있긴 했다. 일정한 속도로 흐르는 물이 정해진 규격의 항아리를 채우는 시간이 같다는 원리를 이용한 시간 측정 도구였다. 하지만 이런 물시계가 제 역할을 하려면 사람이 밤낮으로 지켜보며 항아리가 찰 때마다 종을 쳐야 했다.
답답했던 세종은 이렇게 한계가 명백한 물시계의 성능 개선을 명령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자동 물시계 자격루다. 위에서 아래로 일정한 속도로 흐르는 물이 항아리를 채우면, 물 위의 부표가 떠오른다. 그것이 특정 높이(정각)에 도달하면, 연결된 대나무가 동판의 구멍에 장착되어 있던 청동 구슬을 떨어뜨린다.
이 구슬의 신호에 맞춰서 나무로 만든 인형이 움직여 두 시간마다 종을 치고, 밤에는 북과 징을 울린다. 놀랍지 않은가? 피맛골에서 발견된 구멍이 뚫린 동판은 문헌 기록으로만 남아 있던 자격루의 핵심 부품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귀한 유물이었다.
약 600년 전 조선 시대 발명가들이 낮(빛)과 밤(어둠)을 정확하게 구별하는 물시계를 만들었다. 물이 흐르며 만들어낸 정교한 신호가 비로소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 시간의 흐름을 빛과 어둠으로 명확히 갈라 보여준 것이다.

자격루

물레방아

산업혁명의 첫 동력은 불이 아닌 물

시간의 축을 300년 뒤로 옮겨보자. 18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의 기운이 꿈틀대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아는 상식과는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산업혁명을 상징하는 발명품 하면 누구나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을 꼽는다. 하지만 정작 1776년 와트가 효율을 높인 새로운 증기기관을 내놓았을 때 세상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럴 만했다. 와트의 증기기관은 높은 가격, 잦은 고장, 사고 위험 탓에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와트가 1790년까지 15년간 판매한 증기기관은 딱 열 대 정도뿐이었다. 당시 제조업자에게 증기기관은 여전히 낯설고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기계였다. 그렇다면 산업혁명 초기에 증기기관을 대신해서 실을 뽑고(방적기) 면을 짜는(방직기) 기계를 움직인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수력이었다. 1769년 리처드 아크라이트가 발명한, 산업혁명을 상징하는 또 다른 발명품 방적기는 증기기관이 아니라 수차, 즉 물레방아와 같은 흐르는 물의 힘을 이용한 수력에 의존했다. 당연히 산업혁명 초기만 하더라도 공장은 도심이 아니라 수력을 활용할 수 있는 하천 옆에 지어졌다.
19세기 영국의 공장 건설을 주도했던 한 건축가는 1864년 이렇게 증언한다. “186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영국에서 수차를 대신해서 증기기관이 대세가 되었다. 최근까지도 증기기관은 수차를 보조했을 뿐이다.” 한쪽에서는 흐르는 물을 따라서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그 수력의 힘으로 24시간 가동되는 공장. 이것이 산업혁명의 첫인상이었다.
주목할 점은 물이 인간에게 ‘밤의 정복’을 허락했다는 사실이다. 지치지 않고 흐르는 물의 역학적 에너지는 낮과 밤의 구분을 지우며 공장을 밤새도록 가동할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이 되어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증기기관에 왕좌를 내주긴 했지만, 산업혁명을 처음 깨운 주역은 뜻밖에도 불(증기)이 아니라 흐르는 물이었다.
아직도 역사학자와 경제학자를 괴롭히는 미스터리 하나도 귀띔하자. 리처드 아크라이트가 ‘수력’ 방적기를 발명하기 456년 전인 1313년 중국 원나라 시대에 나온 책 <왕정농서>가 있다. 이 책에도 놀랍게도 ‘수력’ 방적기 설계도가 실려 있다. 왜 동양은 물(수력)이 주는 가능성을 포착해 놓고도 문명의 거대한 도약에 나서지 않았을까?

나이아가라 폭포

나이아가라 폭포수,
도시의 어둠을 걷어내다

아크라이트의 시대에서 다시 시간을 126년 정도 한 걸음 나아가 보자. 1895년 8월, 지금은 관광지로 유명한 미국과 캐나다 국경의 나이아가라 폭포에 최초의 근대식 수력발전소가 건설되었다. 바로 애덤스 1호다. 제너럴 일렉트릭은 1896년 11월 15일 이 수력발전소에서 40.2㎞ 떨어진 미국 뉴욕주 버펄로까지 최초의 상업 목적의 송전에 성공했다. 수력발전 시대와 함께 빛의 시대가 열렸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수의 위치 에너지가 터빈을 돌려 전기 에너지로 바뀌고, 이것이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버펄로의 밤을 대낮처럼 밝혔다. 물의 힘이 공장에서 산업혁명을 깨우더니, 126년 후에는 수력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어둠이라는 자연의 한계를 극복하고 현대의 빛 문명을 열었다.
수력발전을 시작한 지 131년이 지난 지금은 사정이 어떨까? 여전히 수력발전은 중요한 전력 공급원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 데이터를 보면, 2025년 기준 수력발전은 전 세계 총 전력 공급량의 약 14%를 차지한다. 석탄과 천연가스 같은 화석 연료를 제외하면 온실기체를 적게 배출하는 전력 공급원 가운데는 최대 규모다. 원자력 발전도 수력만 못하다.

대청다목적댐

인류 문명의 연대기에서 물은
언제나 가장 위대한 빛의 동반자였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 역할을 계속해서 해낼 것이다.

태양의 빛을 저장하는 ‘물 배터리’

21세기 들어서 물은 단지 빛을 밝히는 용도가 아니라 빛을 ‘저장’하는 미래 에너지로 각광받고 있다. 요즘 전 세계 곳곳에서 에너지 전환의 주인공 역할을 하는 태양광, 풍력 같은 재생에너지는 한 가지 심각한 단점이 있다. 태양광은 빛이 있을 때만 전기를 만든다. 풍력은 바람이 불 때만 전기를 만든다. 그러다 보니, 전기가 남아돌 때도 있고 부족할 때도 있다. 에너지 전문가들이 ‘재생에너지 간헐성’이라고 부르는 심각한 문제다.
여기서 물이 빛을 저장하는 구원투수로 등장한다. 태양광이나 풍력 발전으로 생산한 전기 가운데 남는 전기로 낮은 곳(하부 저수지)에 있던 물을 높은 곳(상부 저수지)으로 펌프질한다. 그렇게 높은 곳에 물을 저장해뒀다 한여름 냉방 수요가 폭증해 전기가 부족할 때 수력발전으로 전기를 만든다. ‘양수발전’이라 불리는 이 방식은 물을 거대한 배터리처럼 활용하는 기술이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아질수록 전력 저장의 중요성도 커지면서, 세계 각국에서는 지형 여건이 허락하는 곳마다 양수발전소를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는 중이다.
물은 흐른다. 그렇게 끊임없이 흐르는 물이 낮과 밤을 나누고 산업혁명을 깨우고 전기를 생산해 빛을 밝히고 나아가 전기를 저장한다. 물이 형태를 바꾸면서 문명을 만드는 일은 빛이 퍼지면서 세상을 밝히는 모습과 겹친다. 시간을 재고, 어둠을 밝히고, 끝내 그 빛을 머금어 미래를 준비하는 일까지. 인류 문명의 연대기에서 물은 언제나 가장 위대한 빛의 동반자였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 역할을 계속해서 해낼 것이다.